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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남 Dec 24. 2021

성탄절의 기쁨

# 성탄절의 기쁨


  성탄절에 대한 아련한 첫 기억은 어린 시절 예배당 마루에 앉아 찬송을 부르고 예배가 끝난 후 주일학교 선생님이 나누어주는 빵과 과자를 받아 맛있게 먹었던 것이었다. 해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의미도 모른 채 선물을 받을 생각에 들떠 있었다. 모두가 가난하던 어린 시절의 성탄절은 아이들에게 큰 위안이 되곤 했다. 


  성장하면서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여전히 설렘과 기대가 있었지만 크리스마스 시즌이 끝나면 항상 허전하고 공허했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갈증이 결국에는 채워지질 못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대학생이 되어서도 그 허전함은 지속하였다.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한 이후 나의 크리스마스는 늘 따뜻한 어떤 것으로 다가왔다.  아내가 생겼고 곧이어 아이들도 태어났다. 우리는 가족이 되었다. 가족이 주는 위안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 이후 나는 성탄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다시는 허전하고 공허하지 않은 완벽한 성탄절을 보낼 수 있었다.


  늦은 11월이 되면, 적당한 나무를 구해와 아이들과 함께 반짝거리는 전구를 달고 여러 장식물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다. 오래전 미국 사바나 여행에서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의 초를 산 이후 반짝이는 전구와 짝이 되어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초도 하나둘 늘어갔다. 매일 저녁 난방을 넣어 따뜻한 거실에 이불과 요를 넓게 펴고 네 식구가 다 함께 잤다. 아이들이 서로 가운데서 자겠다고 해서 우리 부부는 떨어져서 자야 하는 것이 늘 아쉬웠다. 내가 아내에게 손을 뻗으면 아내는 내 손을 살짝 잡아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함께 들으며 잠들었다. 


  12월이 시작되면서부터 우리 집 거실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졌다. 12월에는 케이크와 쿠키, 고급 코냑을 첨가해서 풍미를 높인 브라우니를 만들어 교회에도 가져가고 아이들과 나눠 먹었다. 집에 들어서면 늘 따뜻한 공기 속에서 달콤한 과자 굽는 냄새가 났다. 눈이 많이 온 다음 날에는 눈밭에서 눈사람을 만들어 작은 마당에 놓아두고 아이들은 목도리까지 둘러주었다. 


  재영이가 어린이집을 다니던 어린 시절 어느 크리스마스 날 아침, 우리 부부는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만들어 주자면서 재영이 머리맡에 곰돌이 푸 시계를 갖다 놓았다. 너덧 살 어린아이였던 재영이는 아침에 선물을 발견하고 대뜸 “아빠, 이 곰돌이 푸 아빠가 사준 거지요?” 했다. 나는 재영이가 아직 어리고 순진하니까 당연히 산타의 선물이라고 생각할 줄 알았다가 당황했다. “아니야…… 어, 네가 착하니까 산타 할아버지가 주셨나 보다.” 왜 그때 재영이가 그 선물을 엄마나 아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엄마 아빠가 완강하게 산타 할아버지가 놓고 간 선물이라고 우기니까 긴가민가하면서도 믿는 재영이가 참 귀여웠다. 몇 해 뒤 재영이는 이 해프닝의 진실을 캐묻고 “에이 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해요.” 하고 정색을 하고 항의해서 우리 부부가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선영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더 어린 나이에 기획되었다. 선영이가 돌 지나고 첫 번째 맞는 크리스마스에 아내는 백화점에서 산타가 선물을 배달해 주는 행사를 예약했다. 우리 부부는 선영이가 기뻐할 것을 생각하며 기대에 부풀었으나 정작 선영이는 흰 수염을 붙이고 붉은 옷을 입은 청년 산타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느 해에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케이크를 사다 베란다에 두었다. 화이트 크림이 풍성한 케이크였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크림이 모두 없어지고 카스텔라 부분만 남아 있었다. 그 당시 둘째는 갓난아기였고 선영이는 만 네 살 남짓이었기 때문에 선영이가 먹었을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다. 처음에 아내는 쥐가 먹었나 생각하기도 하고 좀도둑이 들어와 먹었나 하는 엉뚱한 생각도 했다. 여하튼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하고 있는데 선영이가 주춤주춤 다가와서 자기가 먹었다고 고백했다. 그 조그만 배에 어떻게 그 많은 크림이 들어갈 수 있었을까 신기해하면서도 혹 배탈이 안 났는지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아이는 별 탈 없이 지나갔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크림의 달콤함에 빠져 밤새 들락거리며 손가락에 조금씩 묻혀서 먹다 보니 커다란 케이크의 크림을 다 먹었다는 일화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우리 식구들이 되풀이하며 웃는 이야기 소재가 되었다. 


  아이들이 중·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부터 우리 가족은 함께 모여 살지 못했다. 어느 해는 나는 제주에 아내는 서울에 선영이는 시애틀에 그리고 재영이는 헬싱키에서 살았다. 우리 가족 모두가 그러했겠지만 나는 늘 아내를 그리워하고 내 딸 선영이와 재영이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래도 따뜻한 기억이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어서 힘들었지만 늘 서로를 위로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함께 보냈던 크리스마스는 매번 아름답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 세상 모든 이들의 크리스마스가 그러하지는 않았겠지만, 최소한 우리 가정의 크리스마스는 늘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제 아이들이 다 커서 더는 그 시절과 같은 따뜻하고 이벤트가 있는 크리스마스는 없어진 것이 아쉽다. 몇 해 전 선영이는 결혼하여 미국으로 갔고 아마 재영이도 곧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미래의 어느 날 아이들이 그들의 가족과 크리스마스에 우리를 방문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내가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멋진 성탄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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