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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남 Jan 04. 2020

제주에 눈이 내리던 날

나의 귀여운 체리피커


섬 전체가 하얀 은령의 세계로 변했다. 하룻밤 사이에 온 세상에 눈이 쌓이니 소름 돋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겨울이 되면 눈으로 덮여있는 한라산을 바라보며 언제나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머무는 주변도 하얀 세상으로 변하니 그리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눈보라가 한층 더 풍광을 경이롭게 만들고 있었다. 추울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밖으로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거실의 공기는 따사로운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곳에 재영이가 누워 곤히 자고 있었다. 재영이를 깨워 함께 나가고 싶었지만 참았다. 옷을 주섬주섬 껴입고 눈 세상으로 나왔다. 제법 규모가 있는 아파트 단지인데도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눈밭 위에 발자국도 없었다. 정원에 있는 나뭇가지에 눈이 쌓여 있는 모습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는 듯했다.  내가 처음으로 길을 만들며 큰 길가로 나가 보았다. 역시나 넓은 도로에는 한 대의 차도 없었고 지나간 흔적조차도 없었다.

 

거센 바람에 날리는 눈보라가 내 얼굴을 차갑게 때리고 내 안경은 이내 잔설에 가려 앞이 보이질 않았다. 따듯한 섬이라 10cm의 적설량에 도시가 멈춰버린 것이다. 마치 유령도시 같았다. 그러나 무섭다기보다는 몹시 흥미로웠다. 사각사각거리는 눈밭을 조금 더 걷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의 공기는 여전히 따듯했고 재영이도 세상의 변화를 모른 채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소파에 앉으니 포근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사랑하는 둘째 딸 재영이가 아빠를 보겠다고 제주까지 내려와 집에 있으니 행복감이 밀려왔다. 


제주에는 눈이 오면 웃뜨르에는 쌓이지만 바당 가까운 곳은 내리면서 이내 녹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해안가까지 많은 눈이 쌓였다. 어르신들은 살아오면서 한두 번 보았다고는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라 했다. 공항에는 비행기가 운항하지 못해 수천 명의 관광객이 발이 묶여 그곳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화면으로 보이는 공항의 모습은 아수라장 같았다.


주방으로 가서 전기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만델링 25g을 갈았다. 그리고 진하게 따듯한 커피 한 잔을 내렸다. 묵직한 커피가 바디감도 좋고 밸런스도 완벽했다. 집안은 커피 향으로 가득 찼다. 나는 느긋하게 식탁에 앉아 재영이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잠시 후 재영이가 잠에서 깬듯했다.


“아빠, 우리 오늘 뭐 해요?”

재영이는 바깥세상의 변화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

“글쎄, 오늘 눈이 많이 와서 특별히 할 것이 없을 것 같구나.”


커피잔을 들고 주방에 있는 창을 통해 도로 쪽을 내려다보았다. 사선으로 흩날리는 눈 사이로 미용실 원장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재영아, 미용실 가서 머리나 할까?”

“무슨 머리를…….”

“너 얼마 전에 머리 코팅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니?”


재영이는 미용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고 원장은 바삐 움직였다. 원장은 드디어 준비가 다 되었는지 플라스틱 통에 있는 액체를 재영의 머리에 떡칠하듯 발랐다. 원장의 손은 매우 숙련된 듯 빠르고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철 지난 잡지를 의미 없이 넘기고 있었다. 젊은 시절 아내를 따라 미용실에 가서 몇 시간을 기다리다 보면 남의 시선도 의식되었고 그리 지루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이 들어 딸과 함께 오니 마음도 편안하고 뿌듯하기까지 했다. 두어 시간이 지나자 재영이는 찰랑거리는 긴 자신의 머리를 거울을 통해 보며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빠, 어때요?”

“참 예쁘구나. 불빛에 약간 핑크빛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맞아요. 핑크를 살짝 넣은 컬러 코팅이니까요.” 

“아빠, 나도 마음에 들어요. 감사해요.” 

원장에게 값을 지불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후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눈은 내리고 있었고 바람 또한 매섭게 불고 있었다.


“재영아, 집에 가서 부대찌개 끓여서 밥 먹자.”

“부대찌개가 집에 있어요?”

“응, 네가 온다고 해서 아빠가 장을 많이 보아 놓았단다.”

우리는 얼굴에 눈을 맞지 않기 위해 머리를 숙이고 서로 팔짱을 낀 채 집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재영아, 라면사리는 공평하게 반반씩 먹기로 하자.”

“…….”

재영이는 의도된 아빠의 농담이 유치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섭게 내리는 눈보라도 딸아이의 무대응도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았다. 이미 내 가슴은 뿌듯하고 커다란 행복감으로 가득 찼으니까.


가스레인지 위의 냄비에는 부대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 우리는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전자레인지에 3분간 돌려서 따듯해진 햇반도 준비되어 있었다.


이제는 눈도 바람도 멈추고 기온도 올라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공항이 정상화되고 관광객들도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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