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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남 Jan 14. 2020

월병 그리고 공갈빵

내 딸 선영이

#월병 그리고 공갈빵 


어린 시절 아버지는 저녁이 되어 집에 들어오실 때 가끔 만두를 사 오셨다. 만두는 나뭇결이 드러나 보이는 얇은 종이상자에 10개씩 들어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지는 않았지만 아직 온기가 남아있어 따뜻했다. 나와 동생들은 그 만두를 늘 맛있게 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였지만 빛의 속도로 먹어 치우고는 아쉬워했다. 


아버지는 음식 드시는 것을 좋아하셨고 또한 많이 드셨다. 어머니는 겨울이 되면 배추 100포기의 김장을 하고 쌀 한 가마니와 연탄 수 백장을 들여놓으시며 마음이 든든하다고 하셨다. 겨울나기 준비를 마치고 나면 가족들이 좋아하는 만두를 빚어 먹고는 했다. 만두 빚는 날이면 우리 가족 모두가 합심해서 소를 만들고 밀가루 반죽으로 피를 만들어 만두를 빚었다. 가족끼리 웃고 떠들고 장난치며 만두를 빚다 보면 어느새 엄청난 양의 만두가 쌓여 있었다. 우리는 며칠에 걸쳐 그 만두를 쪄서 먹기도 하고 만둣국으로 먹기도 했지만 계속 먹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우리 집 근처에 안락춘(安樂春)이라는 중국집이 있었다. 명절 전이나 어쩌다가 아버지와 목욕탕을 다녀온 후에는 그곳에 들러 자장면을 먹었고 그 시절 우리에겐 그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사장님이 대만에서 온 화교였는지 안락춘 벽에는 사장님과 장개석 총통이 함께 찍은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장개석 총통은 그 시절 내가 읽고 있던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이라 참 신기했다. 


우리 가족은 그 중국집에 자주 자장면 배달을 시켜 먹었다. 배달시켜 먹으면 면을 다 먹은 후에 남은 자장에 밥을 비벼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가끔 저녁 반찬이 부실한 날이면 아버지의 반찬 타박이 걱정되었는지 어머니는 내게 냄비를 주시며 자장을 사 오라고 하셨다. 그러면 나는 부지런히 안락춘으로 달려가서 볶은 자장이 담긴 냄비를 조심스럽게 들고 왔고 우리 가족은 함께 자장소스에 밥을 비벼 한 때의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우리 집이 단골이라서인지, 명절이 되면 안락춘 사장님이 선물이라면서 빨간 종이상자를 들고 우리 집에 오셨다. 그 안에는 둥그렇고 커다란 중국 과자가 여러 개 들어 있었다. 그 중국 과자의 이름은 ‘월병’이었고 달콤하고 고소한 소가 꽉 찬 것이 너무너무 맛이 있었다. 그래서 해마다 명절이 돌아오면 나는 안락춘 사장님을 기다렸고 또 그가 들고 올 맛있는 월병을 기다렸다. 


큰딸 선영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수없이 많이 해 주었다. 어린 선영이는 자기도 나의 유년처럼 만두를 빚어보고 싶다고 했고 김장도 해보고 싶고 또한 월병도 먹어 보고 싶다고 늘 말했다.

 

어느 날 하루는 선영이가 자기 엄마에게 우리도 김장도하고 만두도 빚어 먹자고 했다가 꾸중을 듣고 내 품에 안겨 흐느끼고 있었다. 서러워하는 선영이를 달래며 “그럼, 우리 월병 사 먹으러 갈까?” 했더니 선영이는 울음을 그치며 지금 바로 가자고 했다. 어린 선영이의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와 기억을 더듬어 종로 3가쯤에 있던 중국 과자를 만들어 파는 가게를 찾아갔다. 


“아~ 공갈빵도 있네!” 했더니 선영이는 공갈이라는 단어가 재미있었던지 “아빠, 공갈빵이 뭐야?” 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 가게는 월병을 포함한 많은 중국 과자와 내가 어린 시절에 먹었던 공갈빵도 팔고 있었다. 나는 공갈빵 하나를 들어 선영이에게 깨서 보이며 이렇게 커다란 빵이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공갈빵이라 한다고 말해 주었다. 어린 선영이에게 너무 재미있었는지 연신 “공갈빵” ”공갈빵” 했다. 사실 공갈빵 안에는 꿀(실제는 설탕이다)이 들어 있어 바삭하고 고소하며 달콤하기까지 해서 맛이 괜찮다. 우리는 월병 몇 상자와 공갈빵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으로 선영이는 엄마에게 받은 상처가 치유되었고 나와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하나 더 늘었다.


그 후로도 우리는 자주 시내로 가서 선영이와 비밀장소에서 한참 시간을 보낸 후 종로에 있는 중국 과자 집에 들러 월병과 공갈빵을 사서 집으로 오곤 했다. 그런데 종로의 그 집은 오래전에 문을 닫았다. 이제는 명동에 한 곳이 남아 중국 과자점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요즘도 가끔 명동에 있는 중국 과자점에 들러 월병 한 개를 사서 먹으며 나의 어린 시절과 선영이와 공유했던 많은 시간을 생각해 본다. 


월병은 여전히 맛있고 그곳엔 공갈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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