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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티 Mar 24. 2021

딸이 출국했다. 집콕 후유증이 몰려온다.

어쩌다 분리불안


일단 철학자 스피노자 님의 말대로 한번 해보려고 한다.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나를 짓누르는 감정이 있을 때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설명할 때 고통이 떠나간다고 한다. 


고통인지, 불안인지, 외로움인지, 울렁증인지 모를 것 같은 이 감정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어찌 됐든 종래에 거의 겪어보지 못한 매우 특이한 감정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상황 설명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딸이 오늘 오전 출국했다. 8개월 만이다. 껌딱지처럼 붙어 지내던 딸이 떠나자, 아니 떠나기 전부터 몰려오는 감정이 생경스럽다. '내가 왜 이런 감정을?'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다음에는 물안개처럼 슬며시 불안하면서 울컥한 감정이 몰려왔다. 앞이 희미하고 뿌옇게 잘 안 보인다.

"나 어떻게 살지?"





어쩌다, 분리불안 


코로나로 모든 게 다 뉴 노멀로 해석되지만 가족이 24시간 붙어지내는 집콕 생활은 매우 여러 가지 상황과 양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많은 발견과 갈등, 다양한 공유로부터 어느새 가끔 일체감을 느끼는 단계까지 가족이라는 구성원 사이에 생기는 친밀감의 밀도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친밀감의 밀도는 그러니까 딱 20년 전 주말부부를 청산하고 가족들이 모였을 때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주말부부를 할 때 우리 가족은 엄마와 아들, 아빠, 딸이 각각 세 군데서 떨어져 살았었다. 나와 아들은 가족의 본거지인 아파트에, 남편은 직장이 있는 도시에 전세를 얻어 생활했고, 작은 아이인 딸은 시댁에서 육아를 맡았다. 주말에만 모였던 우리 가족은 나의 퇴사를 기점으로, 그러니까 경단녀 출발을 시작으로 처음으로 다 같이 모여 살게 되었다.


퇴사하고 신랑 따라 낯선 도시로 거처를 옮긴 나한테 이 사람 저 사람 어떠냐고 물어왔다.

"가족들 사이에 흐르는 친밀감의 밀도가 진해진 느낌이야."

절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았던 가족 구성원이 함께 먹고 자고 나들이하며 느낄 수 있었던 시간들이 모두 소중했다. 남편 하고는 더 자주 싸우고 내가 아이들을 감당해야 할 몫이 너무 버겁게 느껴졌지만 정말 가족들이 진하게 친해진 느낌이었다.  

     

그 후 다시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인간'이었던 나의 다양한 직업적 시도가 이어지면서 가족이 흩어졌다 모였다를 자주 하게 되었다. 또 시동생이 결혼 전까지 2년여를 함께 살았고 시댁의 주택 재건축으로 인해 시부모님이 우리 집으로 들어오시면서 합가가 이뤄졌다. 이후 아들의 기숙사 생활과 진학, 딸의 유학 등으로 4인, 5인, 7인, 6인, 5인, 4인, 3인, 2인으로 한 집에서 기거하는 숫자가 바뀌었다. 


근래 3년간 우리 가족은 4인 가족이 4개 도시에 따로 사는 '매우 독립적인' 가족생활을 영위했다.


4인 가족이 온전히 함께 했던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새삼 따져보니 딸아이가 태어난 98년 이후 4년 정도에 불과했던 것 같다. 이렇게 따로 또 같이 사는 것, 어떤 거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가족이 우리 집이었다.

그런데 딸이 떠난다고, 딸과 떨어져 있는 게 불안하고 슬프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나갈 곳 없는 가족의 집콕 생활


현대 생활이 만들어놓은 틀에 따라 우리는 가족이라도 누구와도 24시간을 온전히 장기간 공유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엄마와 아기도 빨리 떨어질 수 있도록 각종 유아 보육시스템을 갖춰 놓고 어린이집 보육료를 지원할 정도이다. 맞벌이하는 가족은 더더구나 어른들은 직장으로, 아이들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학교에 다니느라 아침과 저녁 시간만 공유한다. 길지 않은 이 시간마저도 사실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그래서 정해진 곳, 그러니까 직장이든 학교든 나갈 곳이 없는 기간이 되면 긴장감이 매우 높아진다. 방학이 비상상황처럼 느껴지는 건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모두 안다. 학교가 얼마나 고마운 곳인지 뼈저리게 알 수 있다. 


코로나 19로 모든 게 달라졌지만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공유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 가장 큰 변화이다. 언제든 돌발적으로 직장이든 학교든 못 가는 상황이 생기고, 대학은 사실상 2년째 오프라인 폐업 상태이다. 집에서 오래 머무르는 일은 안전하고 환영받는 일이 되었다. 동거가족이 아니면 부모를 만나는 일조차 국가적 지시사항을 들먹이며 삼가야 할 일이 되었다. 친구와의 약속은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는 게 국가에 대한 충성이자, 자기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방어조치였다. 


우리는 아직까지 집에서 되도록 오래 머물고, 집에서 모든 먹을 것을 해결하고, 집에서 운동하고, 집에서 놀아야 한다. 집콕은 계속되고 진화하고 있다.


집콕으로 다져진 유대감


일본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딸이 집에 온 건 지난해 7월이었다. 우리보다 한 달씩 늦은 일본 대학은 학기 중이었지만 모든 수업이 온라인으로 진행 중이었다. 혼자 자취하며 온라인 수업을 듣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자 코로나 블루를 가끔 호소했다. 지난해 2월 겨울방학에도 미국 어학연수 때문에 집에 못 온 터라 향수병까지 겹쳤다. 일본의 코로나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던 상황이어서 딸이 일단 집에 오는 게 좋겠다고 함께 결정했다.


2년 이상 집을 매매하려고 해도 안 팔리던 집이 팔렸다. 코로나 대확산과 맞물린 시기였다. 팬데믹이 왔으니 집값이 오를 일은 없어 보여 집 사는 걸 여유 있게 생각했는데, 완전히 예상을 빗나갔다. 하루가 다르게 집값이 오른다는 얘기가 계속 들려왔다. 집은 팔렸고 아직 사지는 못한 상황에서 딸이 집에 온다고 하니 급하게 집을 알아봤다. 집값이 거의 움직이지 않은(비인기지역이라는 말이겠지) 아파트이고 고속도로 타기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냥 계약을 해버렸다. '집을 이렇게 쉽게 살 수도 있는 거였구나' 싶을 정도로 처음 보는 아파트를 그다음 날 바로 계약했다.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해서 24시간을 공유하게 된 엄마와 딸의 생활이 시작됐다. 딸은 온라인 수업만으로 유학생활을 했고, 엄마는 무급휴직 중이었다. 

이사날짜도 급하게 잡고 인테리어도 제대로 못하고 이사하게 되면서 엄마와 딸은 셀프 페인팅을 시작했다. 10년 차 아파트라 대공사 없이 셀프 인테리어가 가능한 영역이 많았다. 

딸의 언어를 빌리면 안 되는 셀인하느라 집에 '영혼을 갈아 넣었다'(이건 개고생 했다는 의미로 쓰는 딸의 순화 언어다).  


딸의 온라인 수업 덕분에 생활은 매우 규칙적으로 돌아갔다. 점심은 항상 12시에 맞춰서 먹었다. 늦잠을 자고 수업시간에 맞춰 일어나는 딸이었지만 일본 대학은 실시간 수업이 많은 데다 점심시간이 낮 12에서 오후 1시 30분까지로 정해져 있었다. 뭘 먹든 우리는 그 시간에 맞춰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식사시간에는 어김없이 블루투스 스피커로 유튜브 음악을 들었다. 선곡에 매우 까다로운 가족 구성원은 서로 취향을 존중하며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악을 골라나갔다. 클래식, 재즈, 보사노바, 팝, 가요 등 장르는 가리지 않았다. 아침에는 주로 클래식을 들었고, 저녁에는 재즈나 보사노바를 들었다. 점심은 노랫말이 있는 곡도 괜찮았다. 딸이 있으니 음악 선곡도 매우 다양해졌고 새로운 곡이 주방에 흘렀다. 최근에는 '팬텀싱어' 곡들을 함께 들으며 얘기 꽃을 피웠다. 딸을 숭상하는 아빠의 유머가 있고 딸은 그런 종류의 찬사들을 즐기며 아빠를 부추기는 유머감각을 보여주었다. 딸이 우스갯소리를 제법 하는 걸 이제야 알았다.  


다 큰 딸아이의 머리를 양쪽으로 묶어보았다. 어릴 때 느낌 되살리는 소꿉놀이 비슷한 거였다. 우리는 그렇게 놀았다. 


딸이 즐기지는 않았지만 주말에는 딸과 함께 숲에 갔다. 새로 발견한 길을 알려주고 나무이름 알아맞히기를 계속해나갔다. 아파트 산책로를 함께 걸었고 아파트 길냥이들을 찾아다니며 함께 놀았다. 아파트 커뮤니티센터 헬스장에서 함께 러닝머신에서 뛰었다. 저녁에는 반신욕을 돌아가며 할 수 있었다. 

같이 마트에 가고 함께 요리하고 먹고 운동했다.  


이번 달로 꼭 23세가 된 딸과 이렇게 많은 걸 공유한 건 처음이다. 24시간 붙어있으며 먹고 마시고(술도 포함해서) 웃고 떠들고 했다. 거기다 셀프 인테리어 하며 고생까지 공유했다. 그런 딸이 오늘 떠나갔다. 너무 많은 걸 공유한 탓인가 보다. 그리움이 너무 진하고 떨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 밀려든다.


딸이 보내온 인천공항과 도쿄 나리타 공항 사진. 모두 거의 텅 비어 있다. 내 마음 같이 공허하다. 



그냥 진하게 느낄까 보다


워킹맘으로 살면서 아이와 분리되는 건 사실 일상이 되게 마련이다. 육아를 온전히 할 수 없기에 유아기부터 어딘가 맡겨야 하고 성장기에도 캠프든 어디든 적극적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딸이 "일본 유학 가겠다"라고 폭탄선언을 한 것도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심지어 입학할 때는 짐 싸서 혼자 일본에 보낸 강심장 엄마였다. 그런 내가 왜?


생경스런 딸과의 분리불안을 경험하며 나를 낯설게 바라보게 된다. 

애들이 어릴 때부터 "어서어서 쑥쑥 커라"하면서 애들을 독립시킬 수 있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학업으로 집을 떠난 후 서운함보다는 홀가분함이 더 컸던 게 사실이다. 다른 도시에 살든, 다른 나라에 살든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8개월간 24시간을 공유하며 쌓은 친밀감이 새삼스런 외로움으로 남았다. 조금 슬프고 울적한 기분이 이어지고 있지만 감정의 경험도 소중하다. 그냥 잘 느끼고 잘 보내고 싶다. 


딸과는 정말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모든 감성을 공유했다. 아주 작은 표정도 서로 읽어주었다. 대충 지나치는 법은 없지만 슬쩍 모르는 척 지켜봐 주었다. 같이 많이 웃었다. 

 

점심을 먹은 후 커피 담당인 딸이 에스프레소를 뽑으며 투덜거렸던 그 말조차 그립다. 

오늘 점심 후에는 혼자서 커피를 뽑아 마셨다. 맛이 없다. ㅠㅠ 마음을 달래려 다디단 케이크에 슈거파우더까지 뿌려 먹었다. 너무 달기만 하다. 맛이 없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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