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녘

나를 저버리는 시간이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위해 한가로운 카페에라도 가서 글을 쓸까 고민하다가, 적당한 카페를 찾기 위해 잠시 걷는 동안, 집안에 혼자 고독하게 있을 토란이가 생각 나 도저히 혼자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참, 토란이는 오몽이가 떠난 뒤 슬픔을 견디지 못한 딸이 기어이 데리고 온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원통리 출신의 진돗개입니다. 원래 데려오려던 예쁜 아이는 진작 다른 사람이 데려가 버렸고, 토란이는 다섯 남매 중에 마지막 남은 가장 못생긴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토란. 강원도 인제 원통리에서 원통하게도 못생기게 막둥이로 태어났다고 토란. 이름을 그렇게 지었습니다. 한동안 정을 주지 못했었는데, 결국 정이 들으려 했던지 데리고 온 첫날 아침 안개 자욱한 산속 고즈넉한 펜션 방에서 온몸 구석구석에 들러붙은 참진드기들을 내 손으로 직접 떼어내주었습니다. 어린 토란이의 몸에 들러붙은 진드기들은 얼추 서른 여 마리. 진드기들을 떼어내주면서 오몽이가 생각나 딸 몰래 울었습니다. 토란이는 이제 어딜 봐도 토란 같지 않고, 홀쭉하고 세련되게 잘 빠진 육 년 근 더덕처럼 자랐습니다. 그래도 내 눈에는 여전히 동글동글 못생긴 귀여운 토란이라 토란이라고 부르며 이뻐하고 있습니다. 벽에 걸어놓은 오몽이 사진을 한 번씩 들여다보고 미소 지으며 토란이를 쓰다듬습니다.


가게를 하고 통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있는 휴일은 일주일 동안 쌓인 집안일과, 파킨슨병이 꽤나 많이 진행된 아버지의 간병과, 우울증을 이겨내고자 어떻게든 힘을 내고 있는 딸아이를 위해 쓰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앞 선 두 달, 휴일 없이 지나갔습니다. 이러다가는 아내가 큰일이 나겠다 싶었는지 오늘은 남편이 오후 시간을 돕겠다고 나서서 오후 시간을 오롯이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수줍게 고개를 내민 노란 산수유 꽃과 코끝 간지럽게 따사로운 봄 햇살에 못 이겨 토란이가 생각나버리고 말았지만요. 어린 시절 강원도 산골에서 흙냄새 나무냄새 맡으며 신나게 뛰어놀았을 텐데, 못난 주인 만나 하루 겨우 두 번 짧은 산책이 전부인 토란이에게 봄을 보여주지 않으면 진짜 못된 주인이 될 것 같아, 그러고 싶지는 않아 발길을 집으로 돌렸습니다.

토란이와 걸었습니다. 오랫동안 천천히 걸으며 토란이의 날씬하게 통통거리는 궁둥이를 한 번 보고, 하늘을 보고, 봄 나무를 보고 바람을 보고 파스텔 톤으로 회오리를 그린 구름을 보고,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을 보고, 한가한 가게를 보고, 탁 트인 도서관 앞 광장을 보고, 빵가게 고소한 냄새를 보고, 주인 따라 산책을 나온 총총한 강아지들을 보고, 어딘지 강아지를 닮은 주인을 보고, 인사를 나누고 다시 걷다가 내 발걸음을 보았습니다. 발걸음이 옮겨지는 딱 그만큼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물리적으로 보이니 마음이 안심이 되었습니다.

지난 두 달 동안 시간은 차가 움직이는 속도만큼 흘러갔습니다. 잠에서 깨고 나서, 해가 지려하거나 잠들어야 할 시간에, 그렇게 근 두 달 동안을 차 안에 있었습니다. 시간은 어느새 차의 이동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가 있었고, 눈과 몸에 보이는 시간은 고작 새벽과 밤뿐이었습니다. 가게에 있을 때도 창밖으로 보이는 시간은 낮과 밤. 시간을 도둑맞은 느낌은 생각보다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장사를 하기 전 시간은 장 그리니에가 얘기한 것처럼 하루 세 번 나를 저버렸습니다. 「해가 저물 때, 내가 잠들려 할 때, 그리고 잠에서 깰 때」*. 그의 말처럼 허공을 향해 문을 열어놓은 그 순간들이 나는 무서웠습니다. 짙어가는 어둠이 목을 조이고, 잠이 몸을 돌처럼 굳어지게 하고, 한 밤 중 나는 무엇일까 결산할 때, 생각할 때, 존재하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 잃어버린 것들과 잃어가는 것들,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할 때, 그 세 번의 순간은 대낮처럼 나를 속여 위로하지 못했기에 무대장치조차 없는 어둠은 나에게 두려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장사를 하기 전, 나는 그 세 번의 순간이 언제나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 불안함마저도 도둑맞아버려 텅 빈 느낌입니다. 지난 두 달이 그랬는데, 오늘은 그 세 번의 순간이 흘러가는 것을 오롯이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안녕, 나의 불안함들아.’

나는 인사를 건넵니다. 반갑기까지 합니다. 안심이 됩니다. 나의 불안들을 물리적으로 느낄 수 있어, 나는 안심이 됩니다. 흡사 창밖으로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는 기분입니다. 잡을 수는 없지만 눈으로 목격이 되는 광경은 보이지 않고 도둑맞는 것보다 안심이 됩니다. 그런 기분입니다. 언제 너를 다시 보게 될지 모르지만, 아마 당분간은 또다시 너를 누군가에게 도둑맞을 테지만,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인사를 건넵니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말아 줘. 토란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공원 벤치에 앉아 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길고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뱉고 아주 조금 눈물을 흘립니다.


토란이가 보드랍고 날렵한 궁둥이를 내 무릎에 바짝 붙이며 나를 위로합니다.

오늘은 행복한 날입니다.

*장 그리니에 「섬」, –고양이 몰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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