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라는 허상
생각이 더운 바람 같은 날.
힘든 일들이 토너먼트 경기라도 벌인 것인지 연이어 이어진다.
잘 써왔던 컵이 깨진 바람에 컵을 장만하기 위해 다이*의 그릇 코너 앞에 한참을 서 있는다.
‘가만있어 보자, 어떤 걸 고를까.’
투박한 머그는 오늘따라 눈이 가질 않는다. 취향에 맞는 문양이 새겨진 커피 잔도 손이 가지 않는다.
데미타세 잔은 너무 작다. 진한 고동색 커피가 선명하게 보이는 컵이었으면 좋겠다. 문득 투명한 유리잔이 떠오른다. 손잡이가 달려서 찻잔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 허브차 종류를 넣으면 좋을 것 같은. 유리잔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는데도 슬픈 감정이 차오른다. 왜인지 모른다. 아니 잘 안다.
아무 문양이 없는 유리잔을 내려놓는다. 무심코 노란색 코스모스와 보라색 데이지 꽃이 새겨진 투명하고 얇은 유리잔들이 눈에 띈다. 노란 꽃보다는 보라색 데이지가 마음에 든다.
딱 그 녀석 하나만 들고 값을 치르고 가게로 돌아온다. 뭘 먼저 담아줄까 하다가 잔을 사러 오가다가 더워진 몸을 식힐 겸 얼음을 담고 냉수를 붓는다. 유리잔에 차가운 물방울이 투명하게 맺힌다. 시원하고 예쁘다. 예뻐서 기분이 좋아진다. 보라색 데이지 꽃이 물을 시원하게 빨아들인다. 슬픈 내 마음이 시원한 물을 눈으로 마신다.
슬픈 일은 그대로인데, 투명하고 얇은 유리잔 하나로 잠시 행복해진다.
슬픔이라는 세상 위에 행복이라는 허상이 잠시 생긴다. 그마나 손으로 만져지는 허상이라 나는 잠시 그 허상에 취해 현실을 달랜다.
내 사랑은 늘 재앙이 되고,
재앙은 항상 사랑이 돼
나의 바다는 사막으로 변해가기만 하고
나는 앞으로 걸어가도 뒤로 넘어지네
비극은 언제나 입 꼬리를 올릴 때 찾아온단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정답을 찾아헤매이다가
그렇게 눈을 감는 것그렇게 잠이 드는 것
허희경 <김철수씨 이야기>, <그렇게 살아가는 것>
나보다 어린 여자가 나를 대신 해 노래 부른다.
그녀가 부른 진실 속에 나의 세상을 투영한다.
내가 마주한 세상은 생각해 보면 언제나 슬픔이었다.
이제야 그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