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끈미끈 달아나

살아남읍시다



사노 요코 씨의 작품들을 아주 좋아한다.

특히 그분이 쓴 에세이집은 그분의 영혼이 그대로 들여다보여 마치 내가 그분의 친구라도 된 기분이 든다.

“있잖아요, 저도요, 저도요.” 하면서 사노 요코 씨가 말한 일상을 공유하고 싶어진다.

선생님이라는 말은 붙이고 싶지가 않다. 선생님이라고 하면 어쩐지 선이 생겨버린다. 게다가 글을 쓰는 사람이다 보니, 내가 한참 제자가 되고 그분은 대가가 돼버린다. 대가 앞에서는 영혼을 나눌 수 없다. 영혼을 공부해야 한다.


오랜만에 사노 요코 씨의 에세이집을 펼쳐 들었다. 너무 많이 들여다봐서 얄상했던 노란색 책이 통통해져 버렸다. 중간부터 읽자 하다가 결국에는 너무 좋아서 에잇! 다시 처음부터 읽자 하고 첫 장을 펼쳤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만 눈물이 핑 돌고 만다.


싫어, 싫어하고 기운차게 살아오긴 했지만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사노 요코 씨는 무엇을 잃어버렸나요.

나는 반대였답니다.

싫은 걸 싫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기운차게 살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있지요,

사람들은 나더러 자기 주관이 확실하대요.

그렇게 보인데요. 하나도 그렇지 않은데.

사람들은 말이지요,

나더러 아주 기운차게 살고 있데요.

그렇게 보인데요. 하나도 그렇지 않은데.

그런데 있지요,

나도 그렇답니다.

요코 씨처럼

나도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항상

슬퍼요.

참 못 말리지요?

기운차게 살던 그렇지 않던,

싫다고 말할 수 있던 그렇지 않던,

결국 무언가 잃어버린 듯 한 기분은 똑같이 느끼는 걸까요?

아니면 덜 기운차게 산 쪽이 잃는 게 더 많을까요?

그건 결국,

사노 요코 씨가 되지 않고,

내가 되지 않으면 모르겠지요?’

첫 장을 넘겨보니 하얀 토끼 한 마리가 퍼져 버린 곰을 베고 누워있다.

곰이 토끼에게 하는 말일까 토끼가 곰에게 하는 말일까.

자세히 보니 토끼도 퍼져 있다.

만약 인생의 위기를 마주친다면 죽은 척을 합시다. 그 어떤 불행이라도 한순간 눈을 돌릴 때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끈질긴 불행이라도 방심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한순간에 미끈미끈 달아나 살아남읍시다.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고 돌아왔다.

아이와 남편이 깊은 우울증을 앓고, 생활이 엉망이 되었을 때 나는 인생의 위기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결코 기운차지 못하게 처절하게. 그렇게 몸으로 막아낸 위기가 이제는 조금 힘이 빠지는지 방심하는 것 같았는데, 곧이어 아버지를 내 손으로 요양원에 보내야 했다. 결코 아버지답지 않은 아버지였음에도, 가족들의 마음에 멍에만 지운 사람이었음에도, 아. 버. 지.라는 이름은 엄청난 무게감을 지운다. 나는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고 온 것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가족 중 그 누구의 삶도 구원하지 못한 아버지였지만, 나 역시도 그분의 말년을 돌보지 못하기에,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고 돌아온 마음을 그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않기로 한다. 위선 떨지 않기로 한다.

‘요코 씨, 나의 불행은 언제쯤 나를 방심하게 될까요? 정작 싫어, 싫어해야 할 때는 그러지 않고, 죽은 척해야 할 때 사력을 다해 싫다고 맞서기 때문일까요? 나의 불행은, 나의 위기는, 참으로 오래 내 등딱지 뒤에 딱 달라붙어 떠날 생각을 않아요. 요코 씨 그렇게 해맑게 웃지만 말고요, 내 못생긴 불행들 좀 쫓아내 주지 않을래요?’

땀이 삐질삐질 나는 튀김기 앞에서 돈가스를 튀기며,

발로는 얼음 팩을 밟고 서서,

요코 씨에게 흥얼흥얼 노래한다.

미끈미끈 달아나 살아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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