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가 밀려든다
<표지사진: Maria berrio, Closed Geometry, 2022>
사노 요코 씨가 말한 대로 죽은 척을 했다. 그래, 한 번 제대로 죽은 척해보자 하고 이번에는 내 앞에 놓인 위기를 보고 두 눈을 꼭 감고,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수많은 요구와 의무들에 글쎄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없소~ 여기 보이는 나는 내가 아니오~ 하며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두 눈을 꼭 감으며 다니다 보니 잠이 소르르 오기도 하고, 예전에는 급하기만 했던 일들이 늘어난 카세트테이프처럼 기이한 소리를 내며 한없이 느려졌다. 나는 뼈가 모두 녹아버린 고대 생물이 되어 바다 위에서 흐느적흐느적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렸다. 세상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나는 내 몸에 부딪히는 것들이 그저 지나가기만을 기다린다.
몇 주를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한순간 주변이 너무나도 조용해진 적이 있다. 소리란 소리가 모두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 것처럼. 궁금해진 나는 주변이 살펴보고 싶어졌다. 이건 너무 조용하잖아. 눈을 떠볼까 조금 많이 고민을 하다가 한쪽 눈만 살짝 떠보기로 한다. 그런데 아뿔싸! 내가 눈 뜨기만을 기다렸던 걸까. 숨을 죽이며, 어떻게 하면 내가 눈을 뜰까 머리를 쓴 것 마냥, 위기가 한꺼번에 나를 덮친다. 수많은 고지서들과 병원비 청구서, 2학기 학비 납기일, 세금신고, 노부모의 민생안정자금 신청과 이사준비, 산더미처럼 쌓인 집안일과,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쌓여 있는 가게의 잡다한 일들, 내야 할 자료들, 부재중 통화들, 답을 해야 하는 카톡들, 주문들, 주문들, 주문들. 너 눈 떴겠다! 와아아아아악! 하며 한꺼번에 내 머리 위로 덮쳐버려서 화들짝 놀란 나는 두 눈을 다시 질끈 감고 있는 힘껏 달아나본다. 있는 힘껏. 그러다가 문득 깨닫는다. 나는 지금까지 줄곧 위기를 내 꽁무니에 줄줄이 매단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는 걸. 늘어난 카세트테이프에서 냈던 기이한 소리들과 뼈가 모두 녹아버린 고대생물은 결국 한 몸으로 다니고 있었다.
에휴.
줄걸음을 멈추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감았던 눈을 뜬다. 내 뒤에 매달린 채로 기이한 소리를 냈던 위기들을 다독인다. 알았어. 도망 안 가. 그래봐야 네 손바닥 안이라는 거 알고 있어. 그런데, 조금만 천천히 갈게. 이미 너무 늦었으니까. 하나씩, 나는 하나씩 밖에 못해. 태생이 생겨먹기를 그렇게 생겨 먹었어. 그걸 모르고 여태껏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려니까 내 생이 이렇게 꼬여버린 것 같아. 그러니까 조급하게 굴지 마. 결국 너희들 모두 내 주름살이 될 테니까. 순서를 기다려. 걱정 말고. 하고 말을 건다. 고개를 들어 세상을 보는데, 문득 후회가 밀려든다.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즐기면서 살걸. 뭐가 그렇게 조급해서 나는 젊은 시절을 주야장천 노동만 했을까. 남편이 벌 때 좀 쉬엄쉬엄, 아이도 쉬엄쉬엄 키우고, 일도 띵까띵까 놀면서 하고, 살림도 하는 듯 마는 듯 남편이랑 흥얼흥얼 소꿉놀이나 할걸. 시집살이도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못해요 할걸. 문화센터 다니면서 좋아하는 그림도 배우고, 저축할 돈 조금 더 떼어다 남편이랑 아이랑 여행 다니고, 집 사는 걸 유보해서라도 배우고 싶은 걸 배우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닐걸. 나의 사랑 오몽이와 우렁이와 까망이 펫 보험도 들고, 어마무시하게 큰 반려견 놀이터도 데리고 다니고, 그 비싼 반려견 리조트도 가고 책도 사고 싶은 만큼 사고, 공연도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친구도 시간 날 때마다 만나고 다닐걸. 친정과 시댁은 뒤로하고 딱 우리 세 식구 그리고 나 이렇게만 생각하고 살걸. 모든 걸 다 떠안고 있으려다 보니, 내가 지금 이렇게 두 눈이나 찔끔 감고 죽은 척이나 하고 있네. 아이고, 힘들구나. 하면서 그만 후회를 해버리고 만다.
고개를 들어 세상을 보니, 초록은 자기 시간에 맞춰 찾아왔고, 바람은 언제나처럼 제 몸을 흐름에 맡기며 떠다닌다. 비는 필요한 순간에 지상으로 떨어지고, 땅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언제나 조급한 쪽은 사람이고, 언제나 역행하는 것도 사람이다. 죽어라고 뒤죽박죽으로 만들며 뒤흔들어 섞는대도 결국 돌아보면 내가 원하는 건 하나였다. 쉼과 행복, 나눔 그리고 언제나처럼 자연이 주는 아늑함. 단순한 이치. 얻는 데 그리 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이치. 그럼에도 결국 돌아 돌아 후회해 가며 깨닫게 되는 이치.
자, 이제 어떡한담?
사노 요코 씨, 저 말이죠, 미끈미끈 달아나다 넘어져 버렸어요. 그것마저도 못하는 저는 이제 어떡한담요?
아직도 미끈미끈 달아나며 요코 씨에게 묻는다.
눈 뜬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