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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셔고양이는 아줌마일까

Grin like a cheshire cat




표현을 하거나 무언가를 설명하는 일이 어려울 때가 있다.  


20대에는 내 감정을 풀어놓고 얘기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머릿속에 드는 생각을 바깥으로 끄집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에세이에 자기 생각을 담담히 써 내려가는 사람들을 보면 감탄하고 만다. 작가들은 담담히 얘기하는 걸 넘어서 은유까지 잘한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표현들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책을 많이 읽으면 표현력이 좋아진다는데 나한테는 전혀 해당이 안 되는 이야기 같다. 사전을 펼치고 공책을 빽빽이 채울 만큼 메모를 하면서 단어 공부를 해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15년을 번역했는데도 그건 어려운 일이다.


20대에는 내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어렵지 않아서 옛날에 포스팅했던 글들을 읽어보면 '아, 내가 이런 표현을 했었어?' 놀라게 된다. 왜 지금은 안될까? 문학적인 표현도 더러 쓰고, 누가 읽으면 "넌 생각이 너무 많아."라고 할 정도로 표현이 어렵다는 소리도 들었는데, 지금은 내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아유, 속 터져. 너 대한 외국인 아냐?"

나도 내 어눌한 말주변에 주눅이 들고 만다.


주말에 친정 부모님을 만났는데 아버지가 대뜸 큰아버지를 모셔놓은 묫자리를 찾아갈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다. 큰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때 돌아가신 터라 장지에 가기는 했어도 워낙 까마득한 옛일이라 위치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올해로 여든여덟이다. 작년에 큰 수술을 한번 받으셨는데 그 나이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리 회복하셨다. 자식 된 입장에서는 그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데 나이를 속이지는 못한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구나 생각이 드는 것은, 수술을 받으신 뒤로 동작이 예전만큼 선명하지 않다. 행동도 생각도 말도 확실히 수술받기 전보다 많이 흐릿해진 기분이랄까. 하체도 부쩍 가늘어지셨다.


언젠가 내 에세이에도 쓴 적 있지만 우리 부모님은 사는 동안 그다지 화목한 가정을 꾸리지 못했다. 그 불안한 정서와 부모에게서 마땅히 받아야 할 감정적 교류에의 결여는 고스란히 우리 자식들 몫이 되었고, 성장하는 동안 그런 불안한 정서를 어떻게든 표출하고 싶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도 엇나가는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언니는 언니 나름으로 오빠는 오빠 나름으로 그리고 나는 글을 통해서 어찌어찌 결여된 감정을 메웠다. 그때의 행위가 채움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조금이나마 안정이 됐을 텐데. 하지만 젊음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아무리 들여다봐도 도무지 허리케인 같은 폭풍우 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 오죽하면 서른도 안된 에밀리 브론테가 '폭풍의 언덕' 같은 수작을 써냈을까. 소설 속 주인공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 시절의 그 폭풍 같은 감정들을 잠재우지 못했다.


나이 마흔을 지나온 나는 이제 그때의 폭풍우는 품고 있지 않다. 영국해협 어딘가에서 소멸해버린 것은 아닐까. 폭풍우가 없으니 감정적으로도 더 안정이 되고 차분해져야 하는 게 맞는데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분명 회오리바람은 없지만 그렇다고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없다. 아버지가 장지 가는 길을 아느냐고 물어왔을 때의 그 심장 내려앉는 순간을 나는 덮어버리고 말았다. 괜한 얘기를 꺼내시는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챘으면서도 나는 귀를 닫았다. 혹은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원망스러운 부모도 부모라고, 시간이 지나 대등한 입장에서 바라보니 그 시절의 원망은 그저 모른 채 지나치고 싶다. 젊은 시절의 모습과는 다르게 한없이 퍼주고 기대려는 엄마에게 어쩔 수 없이 약해지고, 말뿐이지만 그래도 이젠 말로라도 우릴 챙겨주려는 아버지가 마음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장지 같은 이야기가 아직 하고 싶지 않다. 언젠가는 하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뒤늦게야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 순간에 느꼈을 법한 어릿한 마음과 마주하게 되었고, 그 마음을 어찌 표현하지 못해 이렇게 길고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체셔 고양이가 되고 있는 걸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그 체셔 고양이 말이다. 필요한 순간에는 보이지 않다가 불현듯 어디선가 나타나 몸통이나 입만 남겨두고 사라지고, 때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빙글빙글 제자리 돌기를 하고, 언젠가는 입만 나타나서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는 체셔 고양이. 그 불분명한 출현 뒤에는 언제나 알 수 없는 이야기와 괴기스러운 웃음만 던져놓고 사라진다. 내가 딱 그 꼴이 아닐까 싶다. 감정이 곤란해질 때, 어찌 표현하지 못할 때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다가 의식의 흔적만 남겨놓고 사라진다. 그러고는 시간이 지나 무덤 한 순간에 차갑게 날이 선 면도날처럼 그 순간의 기억이 되살아나 입만 뻥긋거리며 소리를 듣지 못한다.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아무 색깔도 띄지 않는다. "하지만 체셔 고양이는 진실만 말하는걸?" 하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나도 진실을 이야기한다. 다만 말을 하다 보면 그 진실이 체셔 고양이처럼 형태가 서서히 없어진다는 것이다. 형태가 없는 진실은 과연 진실일까? 어쩌다 이렇게 희미한 사람이 되었을까 생각해본다.


오랜 결혼 생활을 하고 아이를 키우다 보면 확실히 자기 생각이라는 게 조금씩 희미해지긴 한다. 그게 보편적인 일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애써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 때도 있고 들어도 듣지 못한 척, 보아도 눈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스스로 타이르다 보면 모든 일이 고만고만 넘어가곤 한다. 청년일 때는 가라앉은 먼지도 일부러 털어내 제자리 찾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가치 있고 뿌듯한 일이었는데, 이젠 조용히 있는 것의 미덕을 안다.  대부분의 일들이 가만히 기다리다 보면 생각보다 소란스럽지 않게 정리가 되는 것을 경험했다. 정리되는 동안의 감정은 묵묵히 감내해야 할 일이다. 처음 몇 번은 굳이 내가 끼어들어 교통정리를 하고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놓으려고 했었다. 그리고 번번이 내가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몇 번의 경험으로 나는 내 목소리를 내지 않기 시작했다. 그리고 체셔 고양이처럼 진실을 말하지만 점점 희미해지는 쪽을 선택한 것 같다.


혹시 체셔 고양이도

아줌마일까?


어느 쪽이든 아마 조만간에 다시 아버지를 찾아가야 할 것 같다. 아직 우리 곁에 계실 날이 한참일 거라 믿지만 내가 아무리 체셔 고양이가 되어가든, 아니면 체셔 고양이가 나와 같은 아줌마든 어떤 진실은 덤덤히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에 지금까지처럼 입을 다물고 희미하게 있다 하더라도 듣기는 정확히 듣고, 내 안에 떠오르는 감정은 묵묵히 받아들이기로 해야 한다. 내가 그 감정을 어느 날엔가 어느 순간엔가 체셔 고양이처럼 웃는 얼굴로 드러낼 수 있다면,


그건 또 그것으로 괜찮지 않을까.

"Grin like a cheshire cat."



표지 사진 & 본문 사진 :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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