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무렵,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단편집을 읽고 그가 쓴 난쟁이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그때까지 난 난쟁이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난쟁이 이야기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동화책이 별로 없었다. 동화책이라는 개념이 생소하던 시대이기도 했지만 우리 가족이 살던 곳이 동화책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지역도 아니었다. 다섯 권 남짓인가 있었던 동화책을 책장이 닳도록 읽었던 기억이 난다. [콩쥐팥쥐]와 [해님 달님], [심청이]는 그때 만난 동화 속 주인공들이다. 동화책과 관련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빈약해서였는지, 중학생이 되어 동네 책방에서 만난 신지식 작가의 단편 동화 [하얀 길]과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잭 런던의 [화이트 팽]은 내게 차원이 전혀 다른 신세계였다. 나는 한 송이 하얀 들꽃 같은 생을 살아간 한 소녀의 삶과, 스산한 겨울 풍경이 펼쳐진 제인 에어의 맨체스터 대저택 그리고 화이트 팽이 스콧과 펼치는 아름다운 대자연에서의 우정을 신선의 주문에 홀린 듯 눈으로 쫓으며 머릿속으로 그려냈다. 그야말로 호접지몽이 되어 영혼은 이미 그들의 삶과 함께 하고 있었다.
"멀고 먼, 아주 먼 옛날" 하고 시작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설렌다. 굳이 앞자락에 "먼 옛날" 하고 시작하지 않더라도 누군가 -내 경우는 소설 속 화자가 대부분이지만- 이야기를 들려줄 낌새를 내비치면 내 눈과 귀는 이미 무방비 상태로 열리고 만다. 스무 살 무렵에 만난 난쟁이도 그래서 더 기억에 오래도록 남았던 것 같다. 무라카미 씨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난쟁이는 저 몰래 세계 정복을 꿈꾸기도 하고, 깊고 깊은 지하 동굴 속에서 물레를 돌리며 인간계의 시간을 조정하거나 한 사람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렇게 처음 만난 난쟁이를 통해 나는 그때까지 [피터팬]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머물러 있던 내 상상력을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확장할 수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이 세상 어딘가에 아주 깊고 깊은 동굴이 있어, 난쟁이들이 그곳에서 세상의 흐름을 조정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물레를 돌리고 있을지 모른다. 몰래 내 얘기를 듣고 있다가 혀를 끌끌 차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불쑥 나타나 그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기묘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른다. 난쟁이 이야기에 빠져있다가는 소리 소문 없이 몸을 빼앗길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이야기는 재미있다. 다른 수식어구가 필요 없을 만큼 재밌다는 말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웃기면 웃겨서 재밌고 흥미진진하면 흥미진진해서, 슬프면 슬퍼서 재밌다. 들을 때는 완전히 몰입해서 듣지만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안타까움과 안도감, 즐거움과 여운이 뒤섞여 여하튼 재밌어, 가 된다. 어린 시절 내 주변에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집안에서 전해 내려 오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줄만한 사람이 없었지만 다행히 성장하면서 만나게 된 수많은 책들 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라카미 씨는 직접 발로 뛰면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주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렇게 했다가는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당하겠지만 불과 이십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꽤나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던 것 같다. 맥주 한 잔과 감자튀김만으로 무라카미 씨는 어렵지 않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리고 시대의 이야기꾼이 되었다.
위대한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 된다면 좋겠지만 - 나도 이야기 듣기를 꽤나 좋아한다. 주변에선 정신 나간 짓일랑 하지 말라고 말리지만 종종 길거리를 배회하는 할머니나, 지팡이를 손에 쥔 채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하릴없이 쳐다보는 할아버지를 만나면 괜히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가 "안녕하세요. 여기 자주 나오시나 봐요?" 하고 물어보고 싶어 진다. 그 한마디를 빌미로 이러쿵저러쿵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하고, 추운 날이면 따뜻한 찻집에 들어가 달달한 밀크커피를 마시며 그네들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 진다. 한 번은 동네에서 만난 인사를 잘하는 남자아이가 흥미로워 -요새는 인사 잘하는 아이를 만나기가 쉽지 않아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말을 건 적이 있다. 그 아인 주니어 야구클럽을 다니면서 야구선수를 꿈꾸고 있고, 늦은 밤까지 야구하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야구 용품을 넣은 가방이 무겁지 않느냐고 묻자 멋쩍은 표정으로 무겁지만 재밌으니까 상관없다고 했다. 야, 이 녀석 진짜 야구를 좋아하는구나! 행복한 표정으로 야구 얘기를 하는 그 아이를 보면서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야구 얘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딸아이의 만류로 그 아이와는 1층에서 아쉽게 헤어졌다. "엄마, 그러다가 수상한 사람 취급당해!" 딸아이가 만류한 이유였다.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모르는 척 얼른 집으로 가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되도록 인사하거나 말을 걸지 않는 것이 예의인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연유를 잘 알고 있지만서도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다.
얼마 전에는 텔레비전에 빅데이터를 연구하는 박사가 나와서 요즘 세대는 전화보다는 카톡이나 문자를 더 선호하고, 진짜 위급한 일이 아닌 이상 전화를 거는 것이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 이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 사람의 인생사 따위 듣는 세상은 영원히 막을 내리게 됐구나 실감했다. 깊고 깊은 지하 동굴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고치 삼아 물레를 돌리는 난쟁이들이 집단으로 폐업을 맞이할 위기에 처했다. 야구선수를 꿈꾸는 그 아이와의 대화 이후, 딸은 내게 앞으로는 절대로 다른 집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거나 친한 척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고 나도 애꿎게 수상한 아줌마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아 조심하고 있다.
[주문 많은 음식점], [늑대 숲 소쿠리 숲, 도둑 숲]을 쓴 미야자와 겐지 씨나 [백만 번 산 고양이]의 사노 요코 씨, [자유의 감옥]을 쓴 미하엘 엔데 씨나 [내 친구 꼬마 거인]의 로알드 달 씨, [책과 노니는 집]의 이영서 씨는 어디에서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담아낸 걸까? 단순히 작가적인 상상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옛이야기나 민담, 설화, 신화, 아니 멀리 가지 않더라도 요즘 출간되는 많은 소설들이 모두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기억 속 즐거운 추억이 되고, 평생의 길잡이가 되기도 하며 문자로 옮겨져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간직되는 훌륭한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요즘에는 누. 군. 가. 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이 없어졌다. 뉴스를 통해, 인터넷 활자를 통해 알게 되는 이야기들은 대부분이 우울하거나 기운 빠지는 것들뿐이고,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시작된 작은 오해에 공정의 잣대를 들이밀며 잘잘못을 따진다. 그 안에 들어있는 스토리는 오로지 '니 시정'이고 그 어떤 이해도 공감도 동정도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없다. 자, 도대체 어떻게 된 연유인지 이야기나 들어봅시다, 하며 서로 마주 보고 앉는 일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럼 이제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 듣게 되는 이야기들, 훈훈한 미담으로 혹은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마무리될 이야기들, 어딘가로 흘러들어 가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빛으로 남게 될 이야기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나야 주변에 그런 이야기를 들려줄만한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손 치더라도 다음 세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은 어디에서 이야기를 듣게 될까? 그들이 듣게 될 이야기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전쟁통에 어쩔 수 없이 자기 집 머슴이었던 지금의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가 국수장사를 하게 된 할머니의 이야기, 하는 장사마다 망하다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살장 칼잡이가 되었다가 번듯한 정육점을 차리게 된 아저씨의 이야기는 누구의 입을 통해 전해지게 될까?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람을 도저히 놓을 수 없어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선택했던 이름 모를 여자 선배의 이야기며 당나귀를 타고 산을 넘어 학교를 가야만 했던 할아버지의 그 시절 호기로웠던 이야기, 당신 나라에 건설업 파견을 나온 한국인을 만나 결혼을 하고 평생을 타향에서 친정을 그리워하다가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괴팍한 할머니가 되어 버린 어떤 베트남 신부의 이야기는 이제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깊고 깊은 지하 동굴 속에서 인간 세상의 시계를 돌리는 난쟁이들은 이제 누구의 이야기로 물레를 돌리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