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링띠링 뚜룽뚜룽 따라 따라 짜라랑~하고 언제나처럼 42화음의 전화벨 소리가 울리면 난 습관적으로 전화를 받는다.
“응, 나야”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리라는 걸 마치 전 세계 사람들이 아는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겐 더없이 반가운 목소리. 퇴근을 알리는 전화선 너머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그가 지금 회사 정문을 빠져나와 항상 차를 주차해 놓는 장소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장면이 그려진다. 여기 내방은 따뜻하고 아늑한데 차를 세워둔 곳으로 가는 동안 영하의 기온에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을 그가 안쓰러워진다.
늦은 오후, 바쁜 와중에 퉁명스럽게 받은 전화가 미안했던지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부드럽다. 좋아하는 사람한테가 아니라면 그런 감미로운 목소리로는 말하지 않는다는 그. 지나가는 일상과 다를 것 없는 자연스러운 대화 너머로 차를 빨리 빼 달라는 타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의도했던 것과 달리 “어어~ 집에 들어가면 전화할게!”라며 그는 다시 황급히 전화를 끊는다. 일과 중에도 그렇게 뚝 전화를 끊었었는데, 이번에는 화가 나지 않는다. 늦은 오후에도 화가 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가 집에 들어가면 전화를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직감적으로 오늘은 어쩌면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날, 그는 정말 거짓말처럼 전화를 하지 않는다.
습관.
하지만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이제 화가 나지 않는다. 가끔... 내가 절실하게 그의 전화를 기다릴 때를 제외하고는.
9시네... 이제 들어갔겠구나,
10시... 씻고 밥을 먹고 있겠구나,
이젠 인터넷 게임을 하든가 어제 빌리고 미처 다 읽지 못한 만화책을 읽으려나,
그리고 11시... 잠이 들었거나 여전히 컴퓨터 앞의 화면을 응시하고 있겠지....
책을 읽으면서 혹은 글을 쓰면서 흘끗흘끗 시계를 본다. 그에 대한 이런저런 공상을 하고 있자니 아주 조금, 끝내 전화를 하지 않는 그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가 전화를 하면 딱히 할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일상적인 대화들이 되겠지만 그래도 풋풋하고 하루가 가기 전에 상대방을 확인할 수 있는 마음의 위안 정도라고 할까. 그것만으로도 좋은 일상이 있는 것이다. 없으면 왠지 허전하고 마음이 뻥 뚫린 듯한 익숙함.
머플러를 두르고 털 코트 안에 두터운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장갑까지 끼고 중무장을 하여, 하루 반나절 집안에서 책을 붙들고 씨름한 무거운 머리를 맑게 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멀리 나가지는 못하겠지만 투명한 남색 하늘에 드문드문 박힌 별자리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전화에 대하여.
남녀가 처음 사귈 즈음하여하는 전화와 친구를 처음 사귈 때 하는 전화들. 그때의 설렘과 엄청나게 쏟아지는 수많은 말들, 마음들, 가슴 벅찬 웃음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천히 변하는 처음의 습관들. 약간은 소원해진 듯하면서도 전화선 너머의 그가 혹은 그녀가, 친구들이 지금 무엇을 하면서 전화를 받고 있겠구나,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익숙한 영상들. 상대방에 대해 궁금해 못 견딜 지경이어서 어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간혹 나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될 때도 있는,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놓치게 되는 전화선 너머 그의, 친구들의 마음.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면 잔잔하게 여운이 남는 미소. 곁에 있을 때는 잊히다가도 없어지면 그대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허전해지는 그 존재들. 전화선 너머 또 다른 내가 되어 버린 사람들에 대한 생각.
으음... 문득 지금의 이 마음 글로 써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차가운 하늘에 한번 시선을 주고 다시 따뜻한 나의 방으로 돌아온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정말 잘 들어갔을까 새삼스레 걱정되는 마음에 수화기를 손에 든다. 전화선 너머의 그는 나의 예상대로 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