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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음이 날 끌어들이다. 어디로?

흉터를 기억하다




중심가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대형 서점이나 다용도 쇼핑몰,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공원이- 도무지가 이해하기 힘든 소음이 끊이질 않는다. 게임몰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음, 쇼핑몰의 그렇고 그런 유행가,  공원이나 서점에 나지막하게 틀어놓은 경음악, 식당에 앉아 또는 카페에 앉아 정말 열심히 무언가를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모두가 열심히들 떠들고 있다. 그게 영양가 있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그저 그런 시간을 죽이기 위한, 또는 홀로 됨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픈 사람들의 발버둥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은 영양가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로서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뭔가를 참 열심히도 말하고 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옆에 앉아 가만히 듣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또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 소리를 그냥 소리로써만 듣고 있으면 그건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전혀 낯선 세계에서 새어 나오는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지금 나도 귀에 이어폰을 꼽고 이소라가 불러대는 분노에 대한 음악을 듣고 있기는 하지만 -내 말은 지금 이 음악도 내겐 일종의 소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현재 내가 앉아 있는 이 게임방에서 흘러나오는 열광적인 게임 배틀의 소음보다는 한결 났다.


화요일 오후에 받는 수업이 펑크 나는 바람에 두 시간 정도의 여유가 남아 서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지하상가를 지나 근래 생긴 대형서점에 오랜만에 발걸음을 옮기며 내 주위를 부유하는 소음을 듣는다. 소음이 흘러가는 방향을 따라 사람들도 끊임없이 어딘가로 부유해 가고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지만 물론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나는 그저 세상과 조금 동떨어져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겨울, 따한 핫쵸코가 생각나 정말 합리적인 가격으로 판매하는 버거킹의 핫쵸코를 사들고 쇼핑몰 중앙에 위치한 엄청난 크기의 카페테리아를 스쳐 지나간다. 사람들의 알 수 없는 웅성거림... 모두가 나름대로 동료와 또는 연인, 가족과 함께 여유를 즐기며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다. 그 주위로는 갖 튀긴 팝콘의 고소하고 행복한 냄새가 감싸고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극장 매표소 앞에는 요즘 상영하고 있는 영화의 티저 영상이 전광판에 번쩍거리고 있다. 핫쵸코를 들고 그 앞을 지나가는데 지난날, 사랑했던 사람과 극장에서 영화를 고르기 위해 열심히 그 전광판을 들여다봤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나간 일이야 하며 이내 발걸음을 옮겨 서점으로 들어갔지만 일순간에 일었던 감정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그와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난 뒤 난 한동안 사랑에 관계된 텔레비전 프로나 글들은 일체 읽지 않았다. 지금은 서점에 서서 사랑을 노래한 시인들의 시집을 읽고 있다. 아아... 공감이 가는 내용이야... 이런 느낌이었지... 또는 이 시는 지금의 내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네 하며 슬며시 웃는다. 그때처럼 가슴 아픈 감정도,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감정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 어중간한 느낌을 가슴속에서 느끼며 무표정하게 내 마음을 방어한 채 그렇게 서서 읽고 있다. 차가운 겨울 오후의 팝콘 내음... 손에 들고 있는 핫쵸코의 따뜻하고 달콤한 맛, 그리고 대형서점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제목을 알 수 없는 클래식과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 중간... 어디쯤... 한가운데 서서 난 존재하고 있다.


약간 달콤한 행복 같기도,  불안정한 두려움 같기도,  불쾌한 거슬림 같기도 한. 어쨌든 그 몇 개월간의 도피에서 빠져나와 난 사랑에 관한 글을 읽으며 공감하기도 또 신랄하게 무시하기도 하면서 지금 여기 이렇게 피시방의 요란한 소음을 들으며 앉아 있다. 전혀 나와 상관없는 것 같았던 세계는 다시금 내 삶의 중심으로 들어와 나를 어 들이고 있다.  


허전하다.





첫사랑과 헤어지고 몇 개월간 지독한 우울에 빠져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땐 정말 열병이었다. 내 영혼을 갉아먹는 열병을 마음속에 품은 채 그대로 불구덩이 속으로 또 뛰어들려고 했었다. 그 불구덩이는 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깊고 깊었지만 떨어지면 분명 그대로 활활 타버릴 거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그런 생활을 몇 달간 하고 나니 어디선가 가랑비가 내렸다. 내 뜨거운 열기는 잠깐 동안 내린 가랑비에 조금씩 식어갔고, 지독한 감기약을 먹고 난 후 드는 몽롱한 정신처럼 또 몇 달이 지나갔다. 그리고 머릿속이 하얀 백지장이 돼버렸던 기억이 난다. 아무런 감정도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 순간.

그게 바로 위의 글을 썼던 때였던 것 같다. 그때는 그 열병이 지나가버린 줄 알았는데,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내 열병이 다 나았던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무시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게 아니었다면 저렇듯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도 아련함이 남아있을 리 없을 테니까.... 옛사랑에 대한 아련함이 아니라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모습, 그 순간에 대한 아련함 말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과거의 기억을 놓고 봤을 땐 아픈 상처가 치유된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긴다는 의미도 된다. 그 흉터는 내 살과 너무나도 비슷하게 올라와 있어서, 평소에는 잘 모르고 있다가 불길에 가까이 가거나 떨어지는 빗방울에 닿으면 아련하게 아프거나 간질간질한 느낌이 든다. 아... 여기 흉터가 있었지.. 어떻게 생긴 흉터였더라... 하고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면 그 자리에 그 순. 간. 의 모습이 변하지 않은 채  과거에서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표지 사진 : 핀터레스트 https://pin.it/7ns4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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