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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의 방식

남편이 사랑하는 방법




올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 현관문은 여전히 조용했다. 딸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오면 아무리 늦어도 한 시간 내로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한 시간 반이나 지났는데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간만에 조용해진 집안을 나눠주고 싶지 않아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세차를 하고 있겠거니, 아니면 며칠 전 혼자 가보고 싶다고 말했던 하비 샵을 바로 간 것이겠거니 하며 말끔하게 치워진 집안을 한 짐 내린 마음으로 둘러보았다. 비스듬하게 열어놓은 거실 유리창의 블라인드가 초여름의 가만한 바람에 달그닥 달그닥 흔들리며 거실 마루에 그늘을 드리웠다. 집안을 가득 메운 그 고요함이 너무 좋아서 나는 마룻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마룻바닥은 간밤의 서늘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남편이 있었다면 그 자리는 남편의 차지가 됐을 터였다.     


남편은 침대에서 자는 법이 없다. 처음에는 날이 더워 시원한 마룻바닥이 좋은가 보다 했는데, 날씨와는 상관없이 어느 때고 거실 마룻바닥과 한 몸이 된다. 소파가 있는데도 굳이 바닥에 앉고 눕는다. 소파에 앉을 때와 바닥에 있을 때 체감하는 천장의 높이가 다르단다. 바닥에 누워서 천장을 봐야 숨통이 트인다고 한다. 그러고는 초저녁부터 곯아떨어진다. 거실에 메아리가 칠만큼 기세 좋은 소리로 코를 곤다. 그럼 나와 딸은 초저녁부터 자연스럽게 거실에서 퇴출된다. 우리 두 모녀는 텔레비전을 즐겨 보지 않아 거실에서 쫓겨난다고 해서 속상하지는 않지만 간혹 작정하고 영화를 보는데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면 조금 짜증이 나긴 한다. 그럴 때는 사력을 다해 남편을 깨워 안방으로 보낸다. 그런데 그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잠에서 깨지 못하는 남편과 몇 차례 실랑이를 벌이고 나서야 겨우겨우 안방으로 들여보내는데, 그즈음이 되면 이미 영화를 이어 보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그럼에도 남편이 밉지 않은 이유는 비몽사몽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억지로 잠을 깨운 것이 미안해 에둘러 무슨 생각을 하느냐는 내 질문에 화도 내지 않고 여기가 이승인지 저승인지 생각 중이란다. 퉁퉁 부운 눈과 정줄을 놓은 표정으로 그런 대답을 참 잘도 해서 그만 웃음이 터져버리고 만다.     


남편이 두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서울에 네이버 하비 샵을 가보겠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토요일 아침에, 그것도 말없이 갈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남편의 방식이 아니다. 남편은 그 좋은 프라모델을 사놓고도 몇 년을 묵히고 나서야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 조립을 하고 차에 다는 자전거 거치대를 사놓고는 2년이 지나서야 설치를 하는가 하면 화단 벽에 방수페인트를 칠해야 한다면서 페인트 통을 가져다 놓고 계절이 흘러가는 걸 난처한 표정으로 지켜본다. 느긋하다고 해야 하는지 무심하다고 해야 하는지.... 며칠 전에 나온 얘기라면 족히 6개월은 지나고 나서야 갈 사람인데 갸웃한 마음에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전화를 걸어보았다.     


"왜 안 와?"

"어…." 남편이 말을 잇지 못한다.

"뭔데? 하비 샵 간 거야?"

답답한 마음에 혹시나 넘겨짚은 생각을 물어보니 남편이 웃으면서 그렇다고 한다. 알쏭달쏭한 웃음이다. 그래도 어찌 됐든 어디를 가고 있다니 마음속에 일었던 온갖 나쁜 시나리오들이 순식간에 흩어진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전화를 끊고 차가운 마룻바닥에 볼을 붙인다. 시원한 나뭇결의 느낌이 피부로, 등줄기로 기분 좋게 전해진다. 살짝 열어놓은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결에 블라인드 살이 일정한 소리로 박자를 맞추는 박 마냥 서로 부딪히며 탁 탁,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불현듯 한 가지 단서가 떠올랐다.      


며칠 뒤면 내 생일이다. 일주일 전쯤인가 코로나가 잠시 잠잠해진 틈을 타서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아이와 강남 교보문고를 방문했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책들을 실컷 읽고 –그때까지 도서관은 여전히 휴관이었다― 온라인으로 사고 싶었지만 실물을 보지 못해 선뜻 주문하지 못했던 중세 필사본에 관련된 책도 찾아보았다. 그 책은 아름다운 겉표지에 장장 73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을 자랑하는 두꺼운 장서였고, 내가 기대했던 대로 중세 필사본에 실린 삽화며 성서 필사본을 실물 크기 그대로 실어놓았다. 하지만 서점에서 사면 원가를 그대로 받으니까 나는 집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온라인으로 사자고 마음먹었다.      


설레는 서점 나들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 책을 사지 못했다. 아이가 사고 싶다고 해서 사준 책들이며 굿즈들, 살림에 꼭 필요한 필수품을 주문하고 식재료를 사고 나니 6만 원이나 하는 그 책을 사기가 망설여졌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책에 대한 얘기를 남편에게 잔뜩 쏟아냈는데, 일주일이 넘도록 책 배송이 되지 않은 것을 보고 남편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런 남편에게 나는 “다음 달에....” 라며 말을 흐렸다.      


‘혹시?’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충분히 그럴 수도!’, ‘그렇지만 강남까지?’, ‘토요일 오전에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을?’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건 내가 직접 사고 싶은데... 까지. 언제나 그랬다. 연애할 때도 신혼 초에도 결혼을 하고 15년이 지난 지금도, 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직접 발품을 팔고 고민을 하다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직접 사고 싶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남편에게 얘기하지 않았으니 알 턱이 없다. 남편이 보기에는 무슨 물건을 살래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고 고민하고, 분명 사고 싶어 하는 눈치인데도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사는 것을 미루는 내가 이해가 안 되기도 할 거다. 남편이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사놓고도 계절이 흘러가는 것을 보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정작 그것이 나에게 적용되면 그냥 두고 보지를 못한다. 당장에 그날 내 손을 잡고 사러 간다. 고맙기는 하지만 아쉬운 느낌이 더러 생길 때도 있다. 그건 오롯이 내가 나를 위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소소한 일이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된 후 내 힘으로 돈을 벌고 틈틈이 모아서 즐겼던 그 소소한 일이 결혼 생활이라는 틀에 빼앗기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있다. 하지만 어쨌든 토요일 오전에 강남행 경부고속이라니, 한숨부터 쉬어졌다. 양재에 진입하고부터 길게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차들의 행렬이 햇살을 받아 그림자를 드리운 블라인드 살 사이로 그려졌다.       


그렇지만 가만있어봐, 하고 나의 생각은 또 다른 갈래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만일 남편이 나를 대신해 그 책을 사줄 요량이었다면 벌써 내가 알고도 남았을 텐데? 남편은 저 몰래 계획한 일을 끝까지 비밀로 지키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계획한 일에 깜짝 놀라 기뻐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입이 근질거려서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딸아이가 그토록 바라던 한정판 운동화를 깜짝 선물로 사주자고 나와 입을 맞췄을 때도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딸아이에게 신나게 우리 계획을 발설했었다. 분위기 좋은 찻집이나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을 알게 되어 나에게 깜짝 데이트를 선사해주마고 선언했다가도 “거기가 어딘데, 응?” 하고 한마디만 물어보면, “거기가 말이지, 이태원에서 알아주는 식당인데....”하며 주저리주저리 맛집을 알게 된 경위며 자신의 은밀했던 계획을 털어놓는다. 한 번은 내가 뭔가에 홀린 듯 여행사 사이트에서 해외여행 패키지를 결제한 적이 있었는데 우리 세 가족만 다녀온다는 사실이 미안해져 친정 식구들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틈을 참지 못하고 친정 언니와의 식사자리에서 남편이 자랑하고야 말았다. 아뿔싸! 해외여행 한 번 같이 가자고 했던 언니의 벙 찐 표정과 등줄기로 땀이 주르륵 흐르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다행히 그 순간에 어찌저찌 언니의 서운함을 풀어주긴 했지만, 말을 안 해 그렇지 언니의 서운함이 완전히 가셨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남편의 그런 성격이 재밌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워 어째 저런데, 하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지금은 하얀 거짓말로도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이지 못하는 그의 정직함이 참 맑고 강직해서 좋다. 아마도 내가 그를 더 좋아하게 된 것이리라 생각된다. 배는 나오고 머리는 희끗해지고, 누가 봐도 쉰이 다 돼가는 사람인데, 흔한 말로 중년 아저씨, 꼰대가 된 사람 중에 그런 소년 같은 장난기와 솔직함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남편은 그런 꼰대가 되기 전부터도 솔직하고 장난스러운 기질을 장착하고 있었다. 모습은 변했어도 그의 안에는 아직까지 소 농장을 하면서 쏟아질 듯 커다란 두 눈을 가진 소에게 말을 거는 맑은 시골 소년이 담겨 있다. 처음에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함께 하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그의 안에 들어있는 소년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그 소년에게 길들여지게 되었다.     


‘정말 그런 걸까?’     


흔들리는 바람결에 길게 드리운 블라인드 그림자를 지우는 햇살을 보면서 그때까지 추정한 남편의 행적을 반신반의해본다. 그동안에 그의 방식대로라면 깜짝 선물이라고 하고선 강남에 간 것이 맞는데, 지금껏 그 깜짝 계획을 말하지 않고 참아낼 수 있었을까 하는 점에서는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척추 뼈에 마룻바닥의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었다. 나도 모르게 말초신경까지 전해는 그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떠는 순간 도어 록이 삑삑하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다.      


“하비 샵 간다더니 어째 빨리 왔네?”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보는 내 앞으로 남편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종이봉투를 내민다. 입 꼬리를 실룩샐룩하는 모습을 보니 그가 내민 봉투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아 웃음부터 터져 나왔다.

“어? 알고 있었어?” 내 반응이 실망스럽다는 듯 남편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어본다. 놀란 표정을 짓지 않은 게 미안해질 정도다.

“아니, 아니, 몰랐어. 알리가 없잖아. 오빠가 말을 안 해줬는데.”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가 건넨 종이봉투를 열어본다. 의심의 여지없이 일주일 전 봤던 그 책이 봉투 안에 들어있다.

“아니, 이걸 왜 말도 없이 샀어? 내가 다음 달에 살 거라고 했잖아. 급한 것도 아닌데.”

“내가 너 이 책 생일선물로 사줄 거라고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지 알아? 말은 그래도 혹시 샀을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내 웃는 표정을 보고 마음이 놓였는지 남편이 여느 때처럼 비밀스러웠던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마음속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이 인다. 익숙한 것에 대한, 변하지 않는 마음에 대한 안도감.     


“그동안 입이 간질거려 혼났네.”그가 웃으면서 말한다.

그래, 이 모습이다. 그만의 방식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며 좋아하는 내 모습을 보며 남편이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그 안에서 미션 컴플릿을 외치고 있을 소년에게 나는 눈빛으로 인사를 건넨다.      


“고마워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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