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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난 이렇게 살아있구나."




Streets of Philladelpia를 들으며 강변거리를 생각한다. 무채색의 음악은 나에게 감정이 배제된 고통 없는 세계를 재현해 준다. 매일 보던 거리, 다니던 길, 풍경들이 어느 순간 전혀 다르게 보인다. 분명 같은 거리라는 걸 알지만 그 속을 떠 다니는 요소들이 잠깐 성분을 바꾸려고 한 모양인지 전혀 다른 색깔로 비친다.

 

예를 들어,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는 나는 지하철 플랫폼 맨 끝에 가있는 것을 좋아한다. 플랫폼 끝에 가서 넘지 말라는 노란 안전선 바깥으로 일부로 한두 걸음 더 나가 지하철이 다니는 어두운 굴속을 응시한다. 언제부터 생긴 습관인지 모르지만 그 어두운 동굴을 계속 응시하다 보면 그 세계 속으로 빨려 들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속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어쩌면 영원히 알지 못할지도 모르는) 전혀 다른 사차원의 공간이 펼쳐져 있고, 전혀 다른 생물이 살고, 전혀 다른 공기가 떠돌고 있다. 흐릿한 회색빛과 어두움이 소용돌이치며 입을 벌려 나를 빨아들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지막 발걸음을 떼어 플랫폼으로 뛰어들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되어, 지하철이 플랫폼 내로 들어온다는 듣기 거북한 안내양의 기계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잠시 후, 회생 불가능한 비만증에 걸린 위장이 게걸스럽게 밥을 달라고 요동치는 것처럼, 어둡고 긴 터널 속에서 점으로 된 하얀빛이 내 쪽으로 내달려온다. 그건 별로 두렵지 않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긴 터널 속에서 날 다시 한 발짝 물러나게 하는 것은 나에게로 점차 다가오는 지하철의 그 헤드라이트가 아니라 검은 소용돌이의 움직임을 헤집어 놓고 나의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바람과, 철로를 거칠게 긁으며 다가오는 전철 바퀴의 굉음이다. 그 굉음이 점차 가까이 다가오면 어떤 몽상에서 깨어 난 내 혼이, 육체에서 분리되는 혼이 있기나 하다면, 송두리째 누군가에게 쥐어졌다 내동댕이 쳐진 것처럼 허탈해진다. 그리고 동시에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이 내 눈앞에 한 문장으로 나타난다.


“난 이렇게 살아 있구나.”


                                  vs



이어폰을 귀에 꽂고 볼륨을 최고로 높여 다소, 아니 사실은 아주 대중성이 강해서 식상한,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이소라의 음악,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를 듣는다. 지하철 플랫폼 앞에서 말이다. 평소에는 별 관심 없이 지나쳤던 풍경들이 이어폰에서 나오는 피아노의 간주로 살아나 움직이는 것 같다. 정확히 말해서 살아나는 게 아니라 내 감정이 꿈틀댄다고 하는 것이 옳겠지만 말이다. 이것은 요란하게 바람을 일으키며 들어와 귀를 멍멍하게 하는 굉음을 내는 풍경과는 다르다. 허탈한 느낌 뒤의 ‘난 아직 살아있구나’가 아닌 진작부터 내가 세상에 살아 있다는 충만한 느낌, 아주 만족스럽고 행복한 느낌을 주려고 미리 계획된 것 같은 풍경이다.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그런 느낌을 느낄 수 있을 만한 때가 됐구나 하는 순간, 지하철 플랫폼이 스스로 판단해서 전원 버튼을 on으로 올린 것 같다고나 할까.... 하여간 피아노의 건반 하나하나가 움직여 아름다운 선율을 낼 때마다 맞은편 플랫폼과 구분을 지어주는 멋대가리 없는 푸른 페인트의 기둥이 움직이는 것 같다. 지하세계의 먼지를 모두 뒤집어쓴 육중한 기둥이 피아노 건반의 움직임에 따라 주위의 정지된 공기에 아름다운 파문을 일으킨다. 공명을 내며 퍼지는 그 음들 속에서 사람들은 날 주시하며 또 철저히 무시하며 다른 세계 속에서 움직인다. 분명히 눈에는 보이지만 절대 만질 수 없는 존재들이라 날 조금은 외롭게 격리시킨다.


긴 터널을 빠져나온 지하철이 눈부신 빛을 반사하며 출렁이는 한강교를 넘어갈 때쯤이 되면 난 자리에서 일어나 지하철 입구 창문에 바짝 기대서 강의 정경을 바라본다. 하루에 한 번 날 정화할 수 있는 때가 있다면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출렁이는 물결과 한정돼 있긴 하지만 도시의 건물들에 갇힌 푸른 하늘과 태양. 난 눈을 들어 지하철이 한강교를 넘는 그 짧은 순간에 다시 생각한다.


“난 이렇게 살아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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