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정류장
고등학교 시절, 무슨 이유에서인지 외유내강이라는 사자성어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한자를 그 무엇보다 싫어했던 내가 어째서 그 단어에 꽂히듯 사로잡혔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어딘가에서 또는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그 단어에서 나는 어떤 힘을 느꼈고 뜻을 알고 나서는 더더욱 내 인생을 그 네 개의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에 끼워 맞추려고 했다. 그 시절 내가 인식하고 있던 외유내강의 뜻은 밖으로는 부드럽고, 안으로는 스스로를 강하게 채찍질한다는 의미였다. 나는 내가 이해하고 있던 외유내강의 의미대로 타인의 허울은 너그럽게 용서하고 나 자신의 잘못은, 혹은 나태함은 가차 없이 깎아내리고 호되게 검열했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40이 된 지금, 사람들이 보는 나는 그다지 외유내강의 이미지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외유내강이 아닌, 외강내강으로 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주변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 일 관계로 만나는 사람들 몇을 제외하고, 친구 한둘 그리고 가족이 전부라고 해도 될 만큼 과거에 내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곁에 없다. 모두 나름의 삶을 바쁘게 살아가서기도 하지만, 나 역시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과의 간격이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결국에는 서로 연락을 하는 것이 되려 어색해지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그런 시간을 거치는 동안 나는 내 나름으로 그들의 존재를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의식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그들의 색을 흔적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그다지 힘이 들거나 고독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 성향이 지극히 개인주의적이어서 그런 것이리라.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낼 즈음, 학업에 관계된 모든 정보는 학부모들의 입소문을 통해 알게 되니 학부모들과 관계를 잘 맺으면 도움이 될 거라고 언니가 말한 적이 있다. 아이와 관계된 것은 나 역시 모두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기에, 아이를 1학년에 갓 입학시킨 새내기 학부모로서 나는 언니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내 성향이 개인주의적이며, 낯을 잘 가리고,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는 것.
나는 나 자신이 아줌마이면서도 아줌마들과는 잘 맞지 않았다. 아이들의 학교생활에서 시작해, 친구관계, 학원 평가 그리고 남편과 시댁과의 일들로 이어진 이야기는 미용 이야기와 가구와 그릇의 선호도로 옮겨졌고, 간혹 시간이 맞지 않아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엄마들에 대한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한 험담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들은 헤어질 때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다음을 기약했고, 그러한 분위기가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것으로 보였다. 정말이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물론 나도 수다를 떤다. 언니와 또는 오래된 친구와 만나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이어지는 끝도 없고 소득도 없는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오로지 수다를 떨기 위한 목적으로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네들의 모임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몹시도 불편했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얼굴인데 그렇게 자연스러운 어조와 표정으로 상대방을 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부자연스럽고 언짢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어떤 목적이, 실리가 끼어들 수밖에 없는 티끌 묻은 의도가 숨어있는 것 같아 -그 티끌은 그보다 더 자주 만남을 갖는 관계로 이어진 엄마들 사이에도 끝까지 따라붙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 앞에서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건 나의 노력과는 관계없는 문제였고 결국 나는 그들 무리에 적응하지 못한 채 외톨이 엄마가 되었다. 시작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느낌이었다.
다른 엄마들은 나를 고집 세고, 주관이 뚜렷하며, 진지하고 타인과 타협할 줄 모르고 성질이 좋지 않은 엄마로 보는 듯하다. 흔한 말로 재수 없는 엄마 정도? 남편은 내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상이라고 한다. 어찌 되었든, 그 시간들을 거쳐 나는 외유내강이 아닌 타인들에게 외강내강의 인물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타인이 나를 그런 시선으로 보는 것이 억울했다. 나는 개인주의적이기는 하지만,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다. 순수한 믿음이 바탕이 된 오래된 관계라고 해도 서로의 거리를 지키고 존중하기를 바라는 사람일 뿐이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울타리를 침범하지 않고도 좋은 관계를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으며, 오히려 상대방의 깊은 구석까지도 더 잘 이해하고 정말로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관계 속에서 내게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나는 무한한 감사와 신뢰, 존경심을 갖는다. 나는 이제 예전처럼 그리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는 애써 나를 감추며 그들 무리에 예속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었다. 나와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채, 그들이 만들어 놓은 무대에서 작은 배역이라도 맡으려고 애썼다. 그런 노력이 결국에는 나를 더 외톨이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지금은 그렇다. 나를 외강내강으로 보더라도 크게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그러는 게 낮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던 크게 개의치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시간의 힘인지 아니면 경험의 힘인지는 모르지만, 누가 나를 어찌어찌 본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내 삶의 궤적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외강내강의 형태를 띠었다면, 어느 정도 그런 모습이 나에게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시간과 경험이라는 여행을 하고 있는 와중에 내가 지금 정류하고 있는 이 정거장에서, 나는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 나를 맞추기보다 그들이 나에게 맞춰 다가오길 바라고 있다. 누구나가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래서 어찌할 겨를도 없이 내가 보이기를 조심스러워하는 영역으로 무턱대고 돌진해 들어오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리 외유내강인 사람이라도 이런 경우에는 당혹스럽고 수치스럽지 않을까- 온화하고 부드럽게 서로의 울타리를 지키며 나와 나란히 가고자 하는 사람이 내게 찾아오기를 바란다. 이런 모습으로 살았다가는 어쩌면 평생 그런 지기를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정류장에서 내가 보이고 싶은 표는 그것뿐이다.
외강내강. 결코 쉽지는 않지만 지금은 그 모습이 편안하고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