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ay here, you say there
글을 쓰고 나면 절대로 남편에게 평. 가. 같은 것을 부탁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20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내가 쓴 글을 남편에게 보여주고 나면 언제나 기분이 석연치가 않았다. 남편은 내가 부탁한 부분에서는 평가해주지 않고 항상 그 외의 자잘한 부분들을 트집 잡고는 한다. 예컨대 철자가 틀렸다는 둥 표현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둥. 물론 그런 종류의 지적도 필요하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번역 일을 하기 전에 교정 교열도 한동안 했었기 때문에 그러한 작업이 탈고 전에 얼마나 중요한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문제는 나한테도 있다. 남편이 그럴 걸 잘 알면서도 항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만다. 그것도 글이 막 시작되는 시점에서…. 나는 보통 글을 처음 시작할 때 철자나 표현방식을 문제 삼지 않는다. 오로지 글의 첫 느낌이라던지 앞으로의 전개가 눈앞에 그려지느냐 하는 점을 중요하게 여긴다. 요컨대 지금 이 순간까지 쓴 글이 눈앞에 펼쳐진 듯 실제적으로 느껴지느냐 하는 문제다. 그 순간에 철자니 표현을 트집 잡으면 정말 곤란해진다. 지푸라기에 막 지펴 올린 불을 군홧발로 무자비하게 밟아 끈 것처럼 글 쓰고 싶은 의욕이 확 사그라들고 만다.
생각해보면 남편은 내 글의 전체적인 느낌을 한 번도 평가해준 적이 없다. 탈고가 된 원고를 모두 읽은 뒤에도 전체적인 소감보다는 철자나 표현을 문제 삼는다. 참 일관성 있다고 해야 하나…. 뭔가 부족하다는 말을 한 적은 있지만 듣는 입장에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쩌면 그것이 남편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평가인지도 모르겠지만 평가를 받는 입장에서는 역시 내 글은 안 되는 건가 하는 자괴감에 빠진다. 그야말로 문자 따위 다시는 보고 싶어 지지 않는다. 내 글은 그대로 노란 파일 상자 안에 갇힌 채 잊힌다. 남편의 평가를 극복하면 될 일이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정말로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 평가야말로 가장 솔직한 것인데 그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극복이라는 단계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요리 같은 것이다. 애써 만든 요리를 먹는 사람이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으면 요리를 만든 사람은 결국 자기 요리에 어떤 맛이 부족한지 또는 과한 지를 모르게 되어 더하지도 빼지도 못하게 된다. 내 경우에는 그 역할을 남편에게 바라왔던 것이고 마흔이 넘도록 그런 역할에 이 사람이 영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깜박 잊는다. 이런 심리 저변에는 어쩌면 남편에게 정말 잘 썼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역시 남편은 나의 철자를 문제 삼고 뭔가 약하다는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핸드폰을 넘겼다. 오랜만에 남편과 아이와 함께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남편은 일 년에 한두 번 손에 들까 말까 한 책을 읽고 있었고 딸은 번뜩이는 영감이 떠올랐다고 해서 블로그에 글을 쓰는 듯하더니 열심히 게임에 빠져 있었다. 나는 오랜만의 가족 카페 나들이에 실컷 멍이나 때리자고 다짐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책이든 음악이든 영화든 관심이 시들해지다 못해 아예 의욕을 잃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만사가 귀찮고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이러다가는 정말 살림이 제대로 되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마음속에 레드 라이트가 켜지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그래도 힘을 내어 일상을 유지하려고 아등바등한다. 문제는 그 뒤에 찾아오는 깊은 무기력감이다. 남편이고 아이고 반려견들이고 모두 내버려 두고 일주일만 혼자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이마까지 차오를 즈음 남편이 오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는 건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카페에서 시간 죽이기'는 딸아이를 낳고 줄곧 집에서만 생활해야 했던 시절에 남편이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아이가 어렸기 때문에 오랜 시간 그 둘을 집에 남겨둔 채 혼자 여행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그렇다고 온 가족이 여행을 가는 건 결국 집에서의 육아를 여행지로 옮기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육아에 지쳐 글을 쓰는 건 고사하고 무엇하나 제대로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즈음이었다. 남편이 세상 모든 짐을 진 듯한 표정으로 살고 있는 내게 잠시라도 좋으니 너 혼자 노트북을 들고 가까운 카페에 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쓰고 싶은 글을 쓰라고 제안해 줬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홀로 카페에 앉는 순간 꽉 막혀있던 목구멍과 콧구멍에서 시원한 한숨이 쉬어졌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그것만으로 좋았다. 나는 감탄스러운 눈으로 카페에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커플을 구경하고 데스크 뒤에서 열심히 음료를 제조하는 바리스타와 카운터 앞에서 주문을 하는 손님들을 몇 시간이고 신기한 듯 쳐다봤었다. 그야말로 That`s ALL 인 순간.
이젠 카페에 혼자 가지 않는다. 아이가 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가족 성향이 모두 늑대과라 혼자하는 활동을 즐기는 편이기 때문이다. 다 같이 카페에 가도 각자가 잘 논다. 오늘 내가 카페에서 하고 싶은 일은 무작정, 무한대로 멍 때리기였고 그 안에서 어떤 기대도 바라지 않았다. 한 시간 즈음 멍하니 카페 인테리어로 놓인 크리스마스 나무를 쳐다보고 있는데, 불현듯 글귀가 떠올랐고 나는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들어 자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애초에 멍 때리기를 목적으로 카페에 간 것이기 때문에 노트북은 없었다. 근 1년 만이었다. 단 한 시간의 멍 때리기만으로 일 년 만에 다시 글이 쓰고 싶어 지다니…. 그렇게 해서 시작된 도입부를 나는 남편에게 보여줬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오랜만에.
어떤 평을 해줘야 할지 난감했던 거라면 차라리 말을 아끼고 글이 조금 더 진행되면 평을 해보겠다고 말했어도 좋았을 텐데. 이를테면, "음, 이것만 봐서는 잘 모르겠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니까 조금 더 써볼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남편은 단칼에 말한다. "반딧불이는 받침이 지읒이 아니고 시옷이야. 그리고 뭔가 약해."
당연히 약하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속으로만 생각한다. 맥없이 사그라든 불꽃을 고이 모아 노란 파일 상자 안에 넣은 채,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앞으로 글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증이 드는지 봐줄래? 하고 부탁했었는데,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남편은 철자와 글 전반이 약하다는 평을 하게 된 걸까? 순식간에 모든 의식이 그의 뇌로 향한다. 그의 머릿속이 궁금해진다. 덩달아 고구마 백 개는 먹은 듯한 답답함이 가슴 속을 꽉 매운다. 하지만 무언가를 더 요구했다가는 말싸움으로 번질 것 같아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십 수년 결혼생활의 노하우다. 답답하더라도 한 박자 쉬어가는 게 지금은 맞다. 나는 흔들리는 동공을 다시 크리스마스 나무에 고정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오랜만에 쓰게 된 글이라서 그만 남편한테 평을 해달라고 부탁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서운한 마음이 먼저였지만 상자 속의 글을 그대로 묵히지는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휴,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남편을 흘끗 쳐다보는데 남편은 속도 모르고 나를 보며 말한다.
"왜? 내가 그렇게 좋아? 알았어, 알았어. 하하하!"
아차차, 남편인 걸 깜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