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움직이는 것
결국 절실함의 문제인 것 같다. 삶이란..
내가 어떤 대상에 절실함을 가지게 될 때, 다른 것에서 약간의 소모, 결여, 박탈감을 느끼게 되더라도 그것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큰 것을 잃고 한 번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삶 속에서 사소하게 잃게 되는 것들에 대해 안타깝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20대에 내게 절실했던 것은 여행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맞본 진정한 자유로움이 내게는 여행이었고, 나는 그 본질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하여 엄한 아버지가 계시는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어눌한 거짓말로 이리저리 피해 가며 홀로 여행을 갔었고 혹여 여행 뒤에 거짓말이 들통나 호되게 야단을 맞더라도 다음 여행을 계획했다.
내 여행에 굳이 동반자가 필요하진 않았다. 대학 신입생 티를 벗고 연애라는 것이 무엇인지, 남녀 사이에 미묘한 감정이 무엇인지, 화장을 하고 여성스럽게 다니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게 된 때, 간혹 나와 동반해 여행을 간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내가 느끼는 자유에 종종 곁문 같은 역할을 해줄 뿐이었다. 홀로 여행이 심심해질 때 잠시 들여다보게 되는 곁문. 그들은 내게 그네들의 연애 이야기를 들려주고, 남녀 사이의 흔한 고민들로 주신제酒神祭를 지내기도 하고, 미래의 희망과 불안에 대해 그리고 생의 철학에 대해 밤새 모닥불을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곁문 덕에 내 삶의 경험이 더 풍부해졌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행 그 자체로는 홀로였어도 나는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홀로 됨이 내게 더 많은 것을 안겨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홀로 안면도를 시작으로 단양, 동해, 여수 일대와 나의 수덕사와 향일암을 돌아다녔다. 내게 자유와 사념 외에 그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은 방랑. 그렇게 나의 20대는 흘러갔고 그때 나의 절실함은 간혹 나와 함께 여행한 친구들과 함께 시간의 지층 속에 파묻혀버렸다.
지금.
나에게는 무엇이 절실한지 생각해본다.
때때로 이제는 시간의 화석이 되어버린 20대의 내 모습이 층층이 쌓인 기억을 비집고 흔적을 드러내긴 하지만, 여행은 이제 내게 절실한 것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분명 어떤 메아리가 나를 아득한 기억으로 소환하기는 하지만 이제 그 메아리를 따라간다고 해도 오롯이 홀로 됨이 아니기에 절실하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내게 오롯한 것은 그때의 내가 버린 소모, 결여, 박탈감이고 완성되지 않은 관계와 감정들이다. 지금의 나는 그 완성되지 않은 것들을 붙들고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고 그것들을 놓아버리게 되면 내 삶에 어떤 파장이 미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더더욱 아이러니 한 것은 그 완성되지 않은 것들을 놓치고 싶지가 않다. 아마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될지 모르지만 그리고 분명 그러하겠지만, 나는 그 완성되지 않은 것들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종종 마음을 비집고 나와 나를 부르는 메아리를 듣고도, 가슴이 저릿해지면서도 내 생활이 된 완성되지 않은 것들로 고개를 돌린다. 그것이 지금의 내게는 절실한 것이기에.
어.느.새.
내가 모르는 사이에.
사소한 박탈감, 결여, 소모라고 생각한 것들을 하나씩 놓아버린 사이, 지금의 나를 점령한 것은 오롯하지 않은 것들이 되어버렸고, 내게 절실한 것이 되어버렸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냈다.
절실함. 결국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