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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1973년의 핀볼

코끼리를 평원으로 돌려보내는 작업이 시작되는 순간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문학사상에서 나온 것을 사라고 권하고 싶다 -열림원, 한양출판, 문학사상 이렇게 세 개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앞의 두 출판사 본은 절판된 상태지만 헌책방에서 간혹 보이곤 한다 - . 문학사상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번역도 깔끔하고 표지도 마음에 든다.  물론 이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알다시피 번역은 번역가의 역량이지만 아무튼 문학사상의 하루키는 좋다. 아래 두 권은 문학사상에서 1996년에 출판한 것과 장정을 달리하여 나온 재판본이다. 


 




 다음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중에 앞 1.2장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장들이 모두 이곳에 모였는데 읽어도 읽어도 좋고 또 좋다. 이런 글이라면 나라도 쓰겠다고 비난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루키가 책의 머리말에 썼는데 사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이렇게 완벽하게 이미지화하여, 그것도 자기만의 문체로 쓰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의 1장과 2장 첫머리는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가 과연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 엄청난 호기심을 자극하고 앞으로 소설을 쓰기로 한 작가로서, 자신이 글을 왜 쓰기로 했는지 여실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1
"완벽한 문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야."

내가 대학생 때 우연히 알게 된 어떤 작가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내가 그 참뜻을 이해하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지만 적어도 그것을 일종의 위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하였다. 완벽한 문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

그렇지만 그래도 역시 무엇인가를 쓰려고 하는 단계가 되면 항상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이 너무나도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코끼리에 대해서 무언가를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코끼리 몰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다.

팔 년간 나는 그러한 딜레마를 계속 안고 살았다 ---- 팔 년 간. 긴 세월이다.

물론 모든 것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것은 일반론이다.

스무 살이 조금 지났을 때부터 쭉 나는 그러한 삶의 양식을 지니고자 노력해 왔다. 덕택에 남한테서 몇 번이고 지독한 타격을 받았고, 속았고, 오해받았고, 또 동시에 여러 가지 이상한 체험도 했다. 여러 사람이 와서는 나에게 말을 걸고, 다리를 건너가는 것처럼 소리를 내면서 내 몸 위를 지나쳐 갔고, 그리고,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십 대 마지막 해를 맞이했다.

지금, 나는 말하려고 생각한다.

물론 문제는 무엇 하나 해결되어 있지 않고, 말을 마친 시점에서도, 혹은 상황은 꼭 같을지도 모른다. 결국, 문장을 쓴다는 것은 자기 치료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치료를 위한 조촐한 시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내가 정직해지려면 해질수록 정확한 말은 어두움의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린다.

변명할 마음은 없다. 적어도 여기에 말한 것은 현재의 나에게 있어서의 베스트다. 덧붙일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도 생각하고 있다. 잘만 되면 훨씬 후에 몇 년인가, 몇십 년 후에, 구제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고. 그리고 그때, 코끼리는 평원에 돌아가고 나는 좀 더 아름다운 말로 세상을 얘기하기 시작하겠지.

나는 문장에 대해서 많은 것을 데레크 하트필드에게 배웠다. 거의 전부라고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불행하게도 하트필드 자신은 모든 뜻에 있어서 불모의 작가였다. 읽으면 알 수 있다. 문장은 읽기 어렵고, 스토리는 엉터리고, 테마는 치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장을 무기로 해서 싸울 수 있는 극히 적은 비범한 작가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그러한 동시대의 작가와 비교해도, 하트필드의 그 전투적인 자세는 결코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하트필드 자신은 마지막까지 자기가 투쟁하고 있는 상대의 모습을 명확하게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불모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팔 년 하고도 두 달 동안 그는 그 불모의 투쟁을 계속했고, 그리고 죽었다. 1938년 6월 어느 개인 일요일 아침, 오른손에 히틀러의 초상화를 껴안고, 왼손에 우산을 받쳐 쓴 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렸던 것이다. 그가 살아 있었던 것하고 똑같이 죽은 것도 별로 화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절판이 된 하트필드의 최초의 한 권을 우연히 손에 넣은 것은 사타구니 사이에 지독한 피부병을 앓고 있었던 중학교 삼 학년 때의 여름 방학이었다. 그때 나에게 그 책을 준 숙부는 삼 년 뒤에 장암을 앓고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몸의 입구와 출구에 플라스틱 파이프를 끼워 놓은 채 지독한 괴로움 속에 죽었다. 마지막에 만났을 때, 그는 교활한 원숭이처럼 지독한 적갈색을 띠고 오그라들어 있었다.
 

나에게는 전부 해서 세 사람의 숙부가 있었는데, 하나는 상하이 교외에서 죽었다. 종전 이틀 후에 자기가 묻어 놓은 지뢰를 밟은 것이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세 번째 숙부는 마술사가 되어서 전국의 온천지를 돌고 있다.


하트필드는 좋은 문장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문장을 쓴다는 작업은, 우선 자기와 자기를 둘러싼 사물하고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감성이 아니라 잣대다." (<기분이 좋다고 안 될 게 뭐야?>,1936년)

내가 자를 한 손에 쥐고 주위를 주뼛주뼛 둘러보기 시작한 것은 분명히 케네디 대통령이 죽은 해였고, 그때부터 벌써 십오 년이 지났다. 십오 년에 걸쳐서 정말로 나는 여러 가지 것들을 버려 왔다. 엔진이 고장 난 비행기가 중량을 줄이기 위해서 화물을 내던지고, 좌석을 내던지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엾은 스튜어디스를 내던지듯이, 십오 년간 나는 모든 것을 내던져 왔고, 그 대신에 거의 아무것도 몸에 붙이지 않았다.

그곳이 과연 옳았던 것인지 어떤지, 나로서는 확신은 없다. 편해진 것은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늙어서 죽음을 맞이하려고 할 때에 도대체 나에게 뭐가 남아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끔찍한 두려움을 느낀다.

"어두운 마음을 가진 자는 어두운 꿈밖에 꾸지 않아. 더 어두운 마음은 꿈조차도 꾸지 않지." 돌아가신 할머니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밤, 내가 맨 처음 한 일은, 손을 뻗어서 그녀의 눈꺼풀을 조용히 닫아 준 것이었다. 내가 눈꺼풀을 내려 줌과 동시에, 그녀가 칠십구 년간 품어 온 꿈은 마치 보도에 떨어지는 여름의 소낙비처럼 조용하게 사라져 버리고, 그 뒤에는 뭣 하나 남지 않았다.


다시 한번 문장에 대해서 쓰겠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나에게 있어서 문장을 쓴다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한 달이 가도록 한 줄도 쓰지 못할 때도 있고, 삼일 동안 낮밤을 꼬박 새워서 쓴 끝에 그것이 전부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된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을 쓰는 일은 즐거운 작업이기도 하다. 사는 것의 곤란함에 비한다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하기 때문이다. 십 대 때였던가, 나는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리고 일주일 정도 말도 못 할 정도로 놀랐었다.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세상은 나의 뜻대로 되고, 모든 가치는 전환되고, 시간은 흐름을 바

꾼다..... 그런 느낌조차 들었다.

그것이 함정이라고 깨달은 것은, 불행하기도 훨씬 뒤의 일이었다. 나는 노트 한가운데에 한 줄의 줄을 긋고, 왼쪽에 그간 얻은 것을 쓰고, 오른쪽에 상실한 것을 썼다. 상실한 것, 짓밟은 것, 훨씬 전에 포기해 버린 것, 희생한 것, 배반한 것...... 나는 그것을 마지막까지 쓸 수가 없었다.

우리들이 인식하려고 노력하는 것하고, 실제로 인식하는 것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놓여 있는 것이다. 아무리 긴자로도 그 깊이를 잴 수는 없다. 내가 여기에 쓸 수 있는 것은 단지 리스트뿐이다. 소설도 아니고, 문학도 아니고, 예술도 아니다. 한가운데로 줄이 하나 그어진 한 권의 보통 노트인 것이다. 교훈이라면 조금 있을지 모른다.

만일 당신이 예술이나 문학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리스인이 쓴 것을 읽으면 된다. 진짜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노예제도가 필요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이 그랬듯이 노예가 밭을 갈고, 식사를 만들고, 배를 젓고, 그리고 그 사이 시민은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시작(試作)에 전념하고, 수학을 다룬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온 세상이 잠든 한밤 세 시에 부엌의 냉장고를 뒤지는 그런 인간은 그 정도의 문장밖에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인 것이다.


2
이 이야기는 1970년 8월 8일에 시작해서, 십팔 일 후, 즉 같은 해 8월 26일에 끝난다.





 나는 무라카미의 소설이 너무도 좋아, "하루키 문학은 언어의 음악이다"라는 하버드대 교수 제이 루빈의 저서를 읽었다. 과연 제이 루빈만큼 하루키 문학을 파헤쳐 본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하루키에 대한 그의 열정은 대단하다. 제이 루빈 교수는 하루키가 언급한 하트필드의 이야기가 결국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글쓰기의 이유라고 한다.  


 하루키는 말한다.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어서, 문장은 읽기 어렵고, 스토리는 엉터리고, 테마는 치졸했다는 하트필드의 글쓰기를 언급하며 8년 하고도 2개월 동안 불모의 작가로서 죽어간 그를 자신이 추구하는 모습과 희미하게 크로스 한다. 과연 하루키는 가상의 인물 하트필드를 자신의 모습으로서 언급한 것일까?  


 가상의 하트필드는  문장을 쓰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문장을 쓴다는 작업은, 우선 자기와 자기를 둘러싼 사물하고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감성이 아니라 잣대다." (<기분이 좋다고 안 될 게 뭐야?>,1936년)  

그리고 우리가 이미 예상했듯이(사실은 그의 소설을 몇 권이나 읽고 제이 루빈 교수의 저서까지 읽은 후에야 "아아~이런 것인가..."하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뒤로 나온  하루키의 소설 한동안 "나"라는 인물을 앞에 내세우면서도 주변에 흘러가는 상황들과 인물들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루키의 소설은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와  "해변의 카프카" 외 몇몇 단편들을 제외하고 주인공이 모두 자기와 자기를 둘러싼 사물하고의 관계를 확인하는 잣대 같은 역할로써 등장한다. 위에 언급한 몇몇 소설이 나오기 전까지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나"는 감정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 마치 내가 남이 되어 나를 보듯 모든 감정이 메말라 있다. 물론 읽는 사람은 그 메마른 이면에 있는 주인공의 심리를 간파하지만 또 동시에 주인공을 따라 사물을 잣대로써 보게 되기 때문에 간혹 당혹스러워지기도 한다. 감정에 푹 빠져있다고 생각한 순간 의식이 나에게서 빠져나가 감정에 몰입하고 있는 나를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태엽 감는 새"에서도 노몬한 전쟁에 대한 끔찍한 묘사가 나오는데 독자는 그 장면에 들어서게 되면 백이면 백 모두 그 상황 속에 빠져 읽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나고 다시 시선이 '나'에게로 돌아오면 우리는 감정을 채 추스르지도 못한 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다음의 세 가지 사건- 노몬한 전쟁과 고양이가 사라진 사건, 그리고 아내의 돌연한 가출-을 규명하기 위해 마치 도서목록 대장에 철자 순으로 정리된 스티커를 하나하나 붙이듯이 침착하게 우물 속으로 들어가려는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주인공 '나'는 도무지가 당황할 줄을 모른다.  

 하루키의 소설에 나오는 '나'는 모든 것이 침착하다. 그러한 침착성은 결국 독자들을 하루키의 세계로 깊이 발을 들여놓게 한다. 그는(하루키와 하루키의 소설에 나오는 '나') 어떻게 보면 무척 냉정한 인간이기도 하고 잘못된 세계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침착하게 바로 잡으려는  따듯한 로맨티시스트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좀 광범위해진 것 같은데 어쨌는 하루키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는 하루키가 앞으로 글을 쓰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장 잘 축약해서 나타낸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그는 글쓰기를 통해서 코끼리를 평원에 돌려보내고 자신은 좀 더 아름다운 말로 세상을 얘기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상실의 시대>를 썼을 당시의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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