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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젤과 슐리마젤

내가 원래부터 슐리마젤로 태어났던 건 아니야 - 슐리마젤의 독백


 


 서평이 쉽게 써질 거라 생각한 책인데 이상하게 한 문장을 이어나가기가 어려운 책이 있고,

이 책은 어렵겠구나 하면서도 쓰다 보면 쓸 거리가 넘쳐서 쓰는 속도가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책이 있다.

아무래도 이번 「마젤과 슐리마젤」은 전자에 한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양인지 첫 문장을 쓰고 지우기가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지금 심경을 그대로 담아 서평을 써보자는 생각으로 시작을 해보았다.


 동화 「마젤과 슐리마젤」의 서평을 쓴 이가 있을까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려봤는데,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서평을 적어놓아서 넋 놓고 읽었다. 어떤 이는 행운과 불행이 결국 이 동화의 마지막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모토, '근면하고 정직하고 진실되며,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들에게 따라온다.'라고 수긍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행운과 불행을 상징하는 마젤과 슐리마젤의 외모를 너무 극명하게 차이 나도록 그려낸 삽화에 우려를 나타내며, 어린 독자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모두 맞는 말일 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변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정직하고 진실된 사람에게 행운이 찾아오는 공정한 세상을 바라는 한편, 세상이 변했기 때문에 더는 불행이나 악이 못생기고 추하며 모두가 꺼리는 외모로 비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디어에서 접하는 악은 바로 우리 이웃에 사는 허우대 좋고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기도 하고, 인형 같은 얼굴에 여리여리한 여성이 데이트 폭력을 일삼아 결국 한 청년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하기 때문이다. 행운은 근면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에게 찾아오기보다, 평범한 사람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재산을 불린 자들의 자손들에게 찾아온다. 물론 선척적으로 얻은 행운을 탕진하는 부자들도 있긴 하지만, 현대 사회는 가진 자들에게 더 관대하고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 공분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굳이 이런 내용까지 공론화시켜야 하는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일들까지 국민 청원에 올라온다. 행운이 근면하고 정직하고 진실되며,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들에게 따라온다는 관념은 어쩌면 과거에는 어느 정도 맞았을지는 몰라도 현대 사회에 적용하기에는 오늘날 정의하는 선의 기준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의문을 남길 수밖에 없다.  


그. 럼. 에. 도  불. 구. 하. 고

「마젤과 슐리마젤」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행운과 불행이 선과 악에 맞닿아 있고,

선의 절대적 개념은 근면, 정직, 진실, 헌신에서

악의 절대적 개념은 음흉함, 부정직, 거짓, 착취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결국 악의 편에 선 자들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는 자신이 생각하는 선과 악의 절대적 개념을 행운과 불행으로 상징되는 마젤과 슐리마젤에 빗대어서 우화와도 같은 동화를 썼으며 삽화가 마고 제마크는 아이작 싱어의 생각을  이 동화책의 마지막 장에 아주 잘 나타내 주었다.


자, 이제 「마젤과 슐리마젤」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이 동화를 알게 된 건, 앞서 리뷰에 올렸던 책「동급생」에서 이다.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 서문에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장 도르메송은 자신이 살면서 읽은 책 중에 그처럼 큰 충격을 느낀 책은 두세 번 밖에 되지 않는데, 그중 하나가 소설 「동급생」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깃털 왕관」이라고 언급한 바 있었다.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가 나의 첫 번째 궁금증이었고, 그래서 도르메송이 느꼈던 그 충격을 나도 같이 느껴보고자 「깃털 왕관」을 찾아보았으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번역 출간되지 않았다. 나는 도르메송이 충격을 느낀 작가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가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차선책으로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그의 동화책 「마젤과 슐리마젤」을 손에 넣게 되었다. 「마젤과 슐리마젤」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동화「마젤과 슐리마젤」에 소개된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는 숱한 문학상을 거머쥔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작가다. 그는 1978년 『원수들, 사랑이야기』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1967년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염소 즐라테』로 뉴베리 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의 작품에는 어처구니없는 바보들(이 바보들은 『바보들의 나라, 켈름』에 총 집약되어 있다.)과 악마, 도깨비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는가 하면 유태인의 민담, 전설, 신비주의 등이 녹아있고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이 담겨 있다.


 동화 「마젤과 슐리마젤」 역시 유대인들에게 전해져 내려온 옛이야기를 바탕으로 행운의 요정과 불행의 요정이 한 사람의 인생을 두고 내기를 한다는 흥미로운 설정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내기의 주인공은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농부 탬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행운의 요정 마젤과 불행의 요정 슐리마젤의 모습이다. 마젤은 누가 봐도 번듯하고 잘생긴 청년으로 그려진데  반해 슐리마젤은 주름살이 자글자글하고 구부정한 등을 한 괴팍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왼쪽이 농부 탬의 모습이다.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자라니 그가 어느 정도로 운이 없는지 짐작이 갈 만하다. 마젤과 슐리마젤은 1년이라는 기간을 정해두고, 1년 동안 농부 탬에게 온갖 행운을 가져다 주기로 한다. 단 1년이 끝나는 시점에 슐리마젤이 나타나 탬을 단 1분 만에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려야 한다. 하지만 사고로 죽게 하거나 아프게 만들거나, 가난하게 만드는 등의 케케묵은 방법이 아닌 슐리마젤이 장담한 수억 가지 불행의 방법들 중에 가장 획기적인 방법으로 탬을 불행에 빠뜨려야 한다. 내기에서 이겼을 경우 슐리마젤은 그토록 원하던 망각의 술을 얻게 되고, 마젤은 슐리마젤의 말대로 세상이 힘과 불행에 의해 지배당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탬의 인생이 마젤과 슐리마젤 두 요정에 의해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는 굳이 동화책을 읽지 않아도 어느 정도 짐작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농부 탬은 1년 동안 마젤이 가져다주는 행운에 힘입어서 왕의 눈에 들어 왕실에 입성하게 되고 심지어 공주의 사랑까지 얻게 된다. 하지만 1년이 끝나는 시점에서 탬은 왕 앞에서 말실수를 하게 되고 곧 교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야기는 언뜻 불행의 요정 슐리마젤의 승리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작 싱어는 망각의 술이라는 장치를 이용해서 결국 탬의 인생을 행복한 결말로 이끈다. 동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전형적인 결말인 듯 보이지만, 사실 「마젤과 슐리마젤」에는 행운은 선이고 불행은 악이다라는 단순한 논리 이상의 교훈을 담고 있다.




「마젤과 슐리마젤」을 읽으면서 내가 유념해 살펴본 것은 삽화였다. 삽화의 그림채가 독보적이면서 생동감이 넘쳐서기도 하지만, 언뜻 선과 악의 대립으로 보이는 행운의 요정과 불행의 요정이 이야기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꽤나 친해 보였다는 사실이다. 마젤과 슐리마젤은 서로 누가 더 잘났고, 사람들이 둘 중에 누구를 더 존경하는지를 두고 언제나 티격태격 싸우는 사이다. 둘은 마을을 어슬렁 돌아다니면서 사람의 인생을 두고 내기를 한다. 사람의 인생을 두고 내기를 하다니 사람 입장에서 듣기 꽤나 불쾌한 소리 같지만, 행운과 불행은 결국 인간의 삶을 숙주로 삼아야 존재할 수 있으니 뭐라 말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작가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는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개념이 결국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네 삶에 녹아있다는 사실을 행운과 불행으로 의인화된 두 요정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불행의 요정 슐리마젤에게는 불행의 요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마저 있어서 읽다 보면 과연 요정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불행한 사람에게나 품을 수밖에 없는 동정심을 갖게 된다.


 망각의 포도주에 흠뻑 취한 슐리마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래부터 슐리마젤로 태어났던 건 아니야. 우리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착한 요정이셨지. 아버지는 낙원에서 물을 운반하셨어. 어머니는 어떤 성인의 하녀셨고. 부모님은 나를 레브 제인벨 학교에 보내셨어. 내가 천사가 되기를 바라셨거든. 그런데 난 부모님이 억지로 공부시키는 게 너무 싫었어. 그래서 부모님 속을 썩이려고 꼬마 도깨비 무리에 들어갔지. 우린 온갖 못된 짓들을 했어. 별 가루와 달 우유같이 여러 가지 금지된 것들을 도둑질해서 배를 채웠지. 밤에는 땅으로 내려가 마구간의 말들을 놀라게 했어....(중략)
불행의 우두머리라는 이 자리에 오를 때까지 나는 꾸준히 못된 짓을 해왔어.

 

 




 어린 슐리마젤이 불행의 요정이 되어가는 과정을 나타낸 삽화다. 슐리마젤이 불행의 요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마젤과 슐리마젤」의 삽화에는 악마와 도깨비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모습이 북유럽 신화에서 볼 수 있는 칼리칸트자로스와 트롤, 고블린, 구울, 사티로스, 하르피아 등을 닮아서 역시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가 북유럽 신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상동물특급」, 프로오르텨 즈비흐트만 글, 라이카미 출판사 - 고대 그리스 신들의 후계자 칼리칸트자로스




불행의 우두머리라는 최고 자리에 오른 슐리마젤이지만, 슐리마젤도 결국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존재일 뿐이다. 슐리마젤은 마젤이 갖고 있는 망각의 포도주를 손에 넣고 싶어 하는데 그 이유가 행복해지기 위해 서기 때문이다.


망각의 포도주는 한 모금만 마셔도 세상 모든 기쁨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마법의 포도주예요. 슐리마젤은 몇 년 동안이나 불면증과 악몽으로 고통받아왔거든요. 슐리마젤은 망각의 포도주가 포근한 잠을 가져다줄 거라고 믿었어요. 은빛 바다와 황금빛 강, 수정 나무가 자라는 정원과 천사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나오는 달콤한 꿈을 꾸게 해 줄 거라고 믿었지요. 또한 슐리마젤은 자신을 따르는 악마와 도깨비, 그리고 다른 악귀들에게 자신이 마젤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악의 표본인 불행의 요정이지만, 슐리마젤이 행복을 바라는 이유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 마젤보다 자신이 더 강한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해 여러 악귀들에게 숭배를 받고 싶어 하는 모습은 성경에 등장하는 사탄의 모습과 닮아있다.



「마젤과 슐리마젤」은 처음에 언뜻 보기에는 마젤에게 초점이 맞춰져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듯 하지만, 탬이 행복해지는 과정에서 마젤이 끼치는 영향은 단순히 탬의 등 뒤에 서서 행운의 기운을 불어넣는 것 밖에 없다. 그 외에는 탬의 타고난 성향, 착실하고 정직하며 사람들을 진실한 태도로 대하는 모습에서 왕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공주의 사랑까지 독차지하게 된다. 이야기는 마젤이나 마젤이 주는 행운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보다는 탬의 성실함과 어려움을 당했을 때 내뱉는 재치 있는 말 한마디가 인생에서 얼마나 소금 같은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행운과 불행은 결국 한 끗 차이. 그 한 끗 차이를 만드는 것은 결국 이 동화의 마지막에 쓰여있는 한 문장에 의해서가 아닐까.



운이란 근면하고 정직하고 진실되며,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에게 따라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그런 성품을 갖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언제나 운이 좋답니다.


 하지만 앞서도 이야기했듯 행운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마젤과 슐리마젤은 이야기 마지막 장의 앞뒷면에 서로 등을 맞댄 채 다시 등장한다. 슐리마젤이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 왕실 악당들과 어울리는 사이 마젤은 뒷짐을 진 채 어디론가 떠나가는데 둘은 또 그 어디에서 사람의 인생을 두고 내기를 하게 될까. 그리고 이번에는 그 내기에서 누가 이기게 될까.




마지막 페이지 앞면 - 악당 캄차와 어울리고 있는 슐리마젤



마지막 페이지 뒷면 - 바로 뒷페이지에 마젤의 모습을 그린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mázel: 행운

schlilmázel: 운이 나쁜 사람

히브리어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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