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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더 레이지

"나를 봐!"  그녀가 그녀들에게...

 



 “여기에 있고 싶었어. 너와 함께 여기에 있고 싶었어.” 나는 말했다.


 페니의 추모식장에 참석하기 위해 학교 강당으로 간 로미가 페니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보고 한달음에 레온에게 찾아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여기에 있고 싶었어. 너와 함께 여기에 있고 싶었어.”


 로미는 1년 전에 강간을 당했습니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이 되죠. 로미가 강간을 당하는 장면으로요. 하지만 로미는 그 장면을 마치 다른 사람의 사건인양 묘사합니다. 나를 나라고 부르지 않고, 그 여자, 그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갑자기 길에 덩그러니 버려진 자기 자신에게로 옮겨갑니다. 이때 길 위에 버려진 사람은 고스란히 나가 됩니다. 그 여자를 항상 등에 업고 있는 내가 길 위에 버려져 있습니다. 셔츠와 브라는 벗겨진 채, 군데군데 상처 자국이 남은 모습으로요.


 언뜻 보기에 이 두 장면은 하나로 이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1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이 놓여있습니다. 작가가 이 두 사건을 하나로 붙인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1년 전의 사건이 주인공 로미가 길 위에 버려지게 되는 일을 계기로 다시금 수면 위에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수면이란, 모두의 집중된 이목이 아니라, 1년 전 자기 안에 깊이 묻어둔 상처를 주인공 로미가 다시금 자기 밖으로 끌어내는 것일 뿐입니다. 로미는 1년 동안 강간을 당한 그 여자를 등에 업은 채, 침묵을 지키며 살아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강간했던 소년이 지역 유지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브 지역의 주민들은 로미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고 모함하는 힘 있는 지역 유지의 말을 더 믿었기 때문입니다. 소설 마지막에 티나가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편했기 때문이야.”라고 말한 것처럼요.


 로미는 그 일 년 동안 거짓말쟁이라는 딱지를 단 채, 학교 친구들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마저 그 지역 유지에게 미움을 사서, 로미에게 붙은 거짓말쟁이라는 딱지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로미는 마음속에 분노를 키우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분노는 자기를 강간했던 소년이나, 자기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향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아무 힘도 행사할 수 없는 로미는 자기가 등에 업고 있는 그 여자를 향해, 자신을 향해 분노를 키워나갑니다.  


 로미는 붉디붉은 매니큐어와 립스틱을 바르기 시작합니다. 그 여자가 되기 전에, 그 여자아이였던 로미는 붉은색을 바르지 않았습니다. 소설 속에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지만, 마지막에 그 여자아이였던 때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다는 내용이 언뜻 비칩니다. 로미는 붉은색을 바르기 시작합니다. 상처 받은 자기 자신을 빨간색으로 무장합니다. 그 여자를 말이지요. 그리고 혐오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몸을, 자기 내면을, 그리고 무방비 상태로 강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안의 또 다른 인물인 더럽혀진 그 여자를 말입니다. 소설 속에서 로미가 자기 외에 혐오하는 인물은 단 한 사람, 페니 밖에 없습니다. 페니는 로미가 유일하게 곁에 두고 싶었던, 자기에게는 거의 이상과도 같은 동성친구입니다. 그런데 그 동성 친구마저 강간을 당했다는 로미의 말을 묵인했고, 오히려 학교에 로미가 보냈던 이메일 내용을 공개하기까지 합니다. 로미는 페니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혐오하기 시작합니다. 동경이 담긴 혐오를요.


 티나도 혐오하지만, 페니만큼은 아닙니다. 오히려 티나의 그 강단 있는 모습을 어느 정도 부러워하기까지 합니다. 지역 유지로 등장한 셰리프 터너 반장 역시 혐오하지만, 로미는 그에게 두려움을 느낍니다. 로미가 터너 반장에게 느끼는 두려움은 자신의 부모님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부모님이 자기를 변호하지 못하고 힘없이 무너질 때, 자신을 강간한 소년의 아버지인 터너 보안관과 그리브 주유 정비회사의 사장인 헬렌은 지역 주민을 모두 속이면서까지 아들을 보호하죠. 로미는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 셰리프 터너 반장과 헬렌 사장을 혐오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합니다.


 로미는 그렇게 자기 주변의 인물들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동경하고, 동경하는 동시에 미워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내면의 그 여자를 혐오합니다. 그러던 중에 로미에게 한 인물이 다가옵니다. 바로 스완스 디너에서 알게 된 레온입니다. 로미는 레온에게 마음의 자리를 조금씩 내주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죠.

 ‘레온은 정말 멋진 사람이다. 레온은 멋있다. 하지만 그렇대도 전적으로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로미는 레온에게 기대고 싶어 합니다. 레온과 있으면 그 여자를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페니의 추모식에 갔을 때, 어느 순간 레온에게 한달음에 달려가 말합니다.

 “여기에 있고 싶었어. 너와 함께 여기에 있고 싶었어.”


 로미는 레온을 통해서 강간을 당했던 그 여자를 묻어버리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래도 로미는 계속해서 빨간색을 입습니다. 그 장면이 바로 로미가 어떻게 하든, 그 여자를 등에 업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레온을 만나는 동안에도 빨간색을 입는 그 여자는 로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레온을 만나면 그 여자를 묻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단지 자기 바람일 뿐이었고, 그것이 바람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로미는 몸으로 직접 깨닫게 됩니다. 레온과 몸을 섞으면서도 그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기 때문입니다.      


 내 입술과 손가락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그 잔상들. 하지만 그는 그 너머를 보고 있다. 그 너머에 있는 죽은 여자를.
 “로미.”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다시 돌아온다.
 “제발 나를 보지 마.”
 나는 고통스럽게 속삭였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 여자의 감각, 벌어진 틈새, 내 안에서 자신을 태워 없애려는 죽은 여자의 감각……그것뿐이었다.     

 


 로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스완스 디너에서 자기에게 넌지시 추파를 던진 트럭 운전수에게 모든 것을 내던지기로 결심합니다. 전화 버튼을 눌러 남자와 약속을 잡고, 자신이 버려졌던 길 위로 자전거를 달립니다. 이제 모든 것을 손에서 놓으려고 하는 순간, 로미 안에서 그 여자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합니다.


 자기를 죽음으로 끌고 가려는 줄로만 알았던 죽은 여자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합니다. 살려달라고, 살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마치 이제 모든 것이 자기 자리를 찾아갈 거라는 듯, 로미는 이 소설에서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동안 마음 깊이 묻어두었던 것들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치 로미의 그 의미 깊은 울음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실종 이후 시신으로 발견된 페니의 하얀 베스파를 발견합니다.


 그 뒤의 일은 쾌쾌한 냄새를 풍기며 고여 있는 웨이크 호수처럼 묵직하고 답답하게 물결칩니다. 페니의 죽음과 관련된 용의자가 브록으로 밝혀지면서 사건은 로미의 결백을 증명하는 것으로 흘러가는 듯하다가 작가는 독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줍니다.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지요. 하지만, 작가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로미가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상처를 결국에는 수면 위로 다시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을, 작가는 이미 로미의 강간과 로미가 길에 버려진 사건을 하나로 묶으면서 이야기 속에서 예견하고 있습니다. 그 수면은 결국 로미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로미는 페니의 살해사건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기보다는 전도유망한 소년 브록이 2급 살인으로 삶이 망가져버렸다는 것에 초점을 두며, 용의자의 삶을 조명해보겠다는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자 라디오를 꺼버립니다. 더 이상 사람들에게서 기대할 게 없다는 듯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사과를 하러 온 티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전의 내 모습을 다시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래? 가드윗에서의 그 아이 말이야.”


 로미는 결국 레온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 치유의 길을 찾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소설에 처음 등장했던 내용이 또 한 번 반복되어서 나오지요.


 매니큐어를 정교하게 바르고, 립스틱까지 정성스럽게 바르고는 말합니다.     

 

자,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나를 봐.
이젠 네가 나를 봐줬으면 좋겠어.     

 


 로미는 여전히 빨간색을 몸에 입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가 되돌릴 수 있을까.’라고 독백을 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리기 위해 빨간색을 입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찾아가기 위한 치유의 과정으로서 정성스럽게 몸에 빨간색을 입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이제 누군가, 자신이, 자기 내면의 그 여자가 자기를 봐주기를 바랍니다. 눈을 감고 입을 틀어막는 것이 아니라, 두 눈을 정면으로 응시한 채, 자신을 향해서, 세상을 향해서 말합니다.



     

나를 봐.
이젠 네가 나를 봐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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