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생의 한가운데

<나를 진정시켜 다오>




 침대 옆 책장 위에 놓인 쪽빛 책이 계속해서 자길 삼키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부터 뱃속 한가운데서 작지만 강렬한 소용돌이가 똬리를 튼 채 온몸을 배꼽 속으로 빨아들이는 기분이 들었다. 쪽빛 책을 읽기 시작한 뒤부터다. 책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단상이 담겨있다. 다양한 사람들이지만 삶의 본질적인 모습은 몇 가지로 압축된다.      


 가난, 풍요, 실패, 성공, 결핍, 극복, 미움, 사랑, 가족, 관계 그리고 죽음.

      

 나는 그중에서 하나의 단어로 나타내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죽음에 강한 이끌림을 느꼈고, 죽음과 마주할 때면 불가피하게 따라오는 두려움과 불안한 감정들이 뱃속에 똬리를 튼 채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 불안감을 뉘에게 털어놓을 수 있으랴? <나를 진정시켜 다오>하고 나는 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밤이 다가온다. 밤과 더불어 내게 낯익은 유령들이 깨어 일어난다. 그래서 나는 무섭다. 해가 저물 때, 내가 잠들려 할 때, 그리고 잠에서 깰 때, 이렇게 나를 저버리는 세 번…. 허공을 향해 문을 열어놓는 저 순간들이 나는 무섭다 — 짙어가는 어둠이 그대의 목을 조일 때 잠이 그대를 돌처럼 굳어지게 할 때, 한밤중에 그대가 나는 무엇인가 하고 결산해 볼 때, 그대가 생각할 때 —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생각할 때, 대낮은 그대를 속여 위로한다. 그러나 밤은 무대장치조차 없다.>     

-장 그리니에 『섬』 가운데     



 장 그리니에는 그의 불안감을 고양이 몰루에게 털어놓았지만, 나는 내 불안감을 털어놓을 이가 없어, 며칠 동안을 소용돌이와 함께 배꼽 안으로 매몰되는 기분으로 지냈다. 그 불안감은 정말로 낮의 찬란했던 빛이 어둠에 잠식하기 시작하는 때에, 그리고 어스름한 어둠이 남아있는 아침 녘 잠에서 깰 때 극심해졌다. 나의 불안감을 뉘에게 털어놓을 수 있으랴? 나는 배꼽 한가운데 똬리를 틀고 있는 이 고질적인 녀석과 다시 마주하게 되었고, 그 녀석이 불러일으키는 결코 무심해질 수 없는 정경들에 담담하게 맞서기 위해 키보드가 내는 소리에 의존하기로 했다.      


 부디 담담해질 수 있기를….     


 키보드가 내는 소리는 한없이 가벼워서 강력한 구심력으로 빨아들이는 불안감에 매 순간 함몰되어 버리지만, 언젠가는 그 가벼움으로 구심력을 벗어나는 순간이 생기기를 희망한다.      


 이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한다.   

   

 그가 지금 내 곁에 있다면, 조금은 내 불안감이 깊은 바닷속 침몰되는 배처럼 가라앉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는 오래전 내 곁을 떠났다.      






 나는 죽음에 대해 꽤 일찍 자각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은 여섯 살인가 일곱 살에 엄마 손을 잡고 언니 오빠와 함께 이맘 모스크에 간 기억이다. 난생처음 가보는 사원에는 맨발로 동쪽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짙은 파란색 타일로 천장을 아름답게 꾸민 방이었다. 방 안에는 남자들만 있었는데, 엄마가 그곳으로는 발도 디디지를 않아서 우리도 아무 생각 없이 방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파란 천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 안에서 동쪽으로 난 창문을 향해 기도하는 남자들의 표정이 무척이나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낮은 소리로 외는 기도문은 지하세계로 향하는 문을 여는 주문처럼 느껴졌다. 목소리들은 점점 아래로, 아래로 꺼져가듯 낮아지다가 이윽고 숨소리만 들렸다. 엄청나게 큰 숨소리의 공명이었다. 어린 마음에 그 공명음은 공포로 다가왔다. 그것이 내가 경험한 첫 죽음이었다.

 

 신에게 염원하는 마음이 왜 나에게는 죽음처럼 무서웠는지, 그 의문은 일 년 전 터키 여행으로 밝혀졌다. 가족들과 함께 방문한 터키의 블루모스크에서 나는 똑같은 장면과 조우하게 되었고, 신을 향한 그들의 절대적인 믿음에서 나는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맹목적인 신앙을 발견했다. 그것은 지금의 우리나라 신앙인이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믿음이었다. 신을 향한 믿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믿음. 그 믿음은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웠고,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하루에 다섯 번 동쪽 하늘을 보고 기도하는 그들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들의 삶 속에는 죽음이 언제나 기념되고 있었고, 나의 삶 속에서 그들의 공명음은 나에게도 죽음을 잊지 말라 말하고 있었다.       






 9살이 되던 해, 한밤 중 공습경보에 잠이 깼다. 창밖으로 하얀 섬광이 번쩍 빛나더니 뒤이어 하늘과 땅을 두 동강 낼 듯 어마어마한 소리가 이어졌다. 테헤란에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엄마는 우리 삼 남매를 모두 깨워서 한 방에 모았다. 오빠와 언니는 무슨 일인가 창밖을 내다보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나는 방안에 있는 이불이란 이불은 모두 끌어 모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아무리 뒤집어써도 창밖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섬광이 보이는 것 같았고, 포탄이 떨어지면서 내는 굉음이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공습경보는 그 전에도 몇 번 경험한 적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가거나 한참 떨어진 이웃 도시에서, 애써 들으려 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울리는 정도였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포탄이 떨어지기는 처음이었다. 죽을까 봐 무서웠다. 나는 그날 밤 이불속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 아침을 맞았다. 오빠와 언니는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옆 동네가 공습을 받고 폐허가 됐다는 소식을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몇 개월 뒤에 우리 가족은 테헤란을 떠나 어렵게 서울로 들어왔고, 이듬해 1988년에 우리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가장 성대한 올림픽을 개최했다. 출전 국가에는 이란도 있었다. 개막식에서 어떤 소년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굴렁쇠를 굴리며 올림픽 경기장 한가운데로 뛰어오던 장면이 생각난다. 브라운관을 통해 화려한 개막식 공연과 들뜬 표정으로 성공적인 올림픽을 기원하는 관중들의 표정이 보였다. 불과 몇 개월 전의 일은 깡그리 잊은 채 나도 개막 공연에 흠뻑 젖어 들뜬 마음으로 코리아나가 불렀던 손에 손 잡고를 흥얼거렸다. 어릴 적 나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준 아잠과 아키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예 생각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너무 평화로웠다. 내 평화로운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두어 달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 민방위 대피훈련의 사이렌이었다. 사이렌이 울리면 주변을 새하얗게 밝혔던 그날의 섬광과 폭발음이 떠올라서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나는 매일 밤 자고 있는 가족들의 가슴팍에 몰래 귀를 대고 숨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그 상태로 한국의 익숙하지 않은 것들 속으로 들어갔다.


 지독한 향수병이 찾아온 것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였다. 그것이 향수병인지도 모른 채 나는 이 섬에서 저 섬으로 방황하며 다녔다. 그 사이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에는 터키 색과 쩍쩍 갈라진 땅, 낮게 중얼거리는 기도문이 어지럽게 섞인 유성물감처럼 무겁게 꿀렁거렸다.   

   

 내가 앓고 있는 것이 향수병이라는 사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서 이어졌어야 할 유년시절의 시간들이 전쟁이라는 부자연스러운 사건 속에서 끊어지고 비틀어져 소멸되었다는 것을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 기억들은 전혀 다른 시공간 속에서 때깔 좋은 색으로 덧칠해져 본모습을 잃어갔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던 나는 평화와 발전이라는 들뜬 분위기가 지배했던 90년대의 우리나라를 기억이 삭제된 채 살아갔다. 나는 나의 유년시절을 앗아간 이란 이라크 전쟁에서 수많은 소년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여러 겹 쌓아둔 이불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며 벌벌 떨고 있을 때, 전장에서는 수많은 소년병들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갔다. 내가 나에게 들러붙은 죽음을 떨쳐내기 위해 새로운 색들로 나를 덧입히는 동안, 그 새로운 색을 제공하는 나라 역시 전쟁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내 유년시절이 소멸되는 사이, 소년병들도 소멸됐고, 이 땅의 수많은 가족들의 추억도 소멸되었다. 아잠과 아키람도 소멸되었다. 소멸되지 않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사이렌이 울릴 때마다 여전히 화이트 아웃이 되어버리는 내 기억과 동쪽 하늘을 어렴풋이 맴돌고 있을 누군가의 기도문이 알려주었다.      


  




 그 뒤로 내게 찾아온 죽음은 꽤나 실제적인 것이었다. 말 그대로 손을 뻗으면 그대로 만져지는 죽음이었다. 청소년기에 막연하게 관념적으로만 두려워했던 죽음과는 결이 달랐다. 그런 실제성을 청소년기에 경험해 본 적이 있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로드킬을 당한 뒤 방치된 채 아스팔트 위에 눌어붙은 청설모의 사를 추도했고, 지나가는 자동차에 머리를 부딪쳐 경련을 일으키며 죽음을 맞이하는 고양이를 옆에서 지켜보았다. 두 동물의 죽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죽음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대학생일 때 긴 오르막길을 올라야지만 캠퍼스가 보이는 학교를 다녔었다. 오르막길이 꽤 길어서, 사실상 걸어 올라간다는 생각은 그날 오후 수업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막바지 졸업논문까지 써야 했기 때문에, 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학교로 올라가는 셔틀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구는 햇빛 외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8월의 한낮이었다. 청설모가 눈에 들어온 건 아스팔트 위로 피어오른 아지랑이 때문에 한순간 눈앞이 핑 돌고 바닥에 그대로 곤두박질 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였다. 간신히 정신줄을 붙들고 눈앞에 보이는 아스팔트의 거뭇한 얼룩에 초점을 맞췄다. 그 거뭇한 얼룩이 청설모의 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한참 지난 뒤였다. 청설모는 말 그대로 바닥과 일체가 되어 있었다. 로드킬을 당한 후 아무도 길에 널브러져 있는 청설모의 사를 치우려고 하지 않았던지 청설모의 사는 속수무책으로 지나가는 차량들에 밟히고 짓이겨져 아스팔트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청설모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한동안 아스팔트에 스며든 검은 자국을 바라본 채 서 있었다. 매미가 기운차게 울어댔다. 셔틀버스가 한 대 지나갔고, 두 대인가 세 대가 더 지나갔다. 지독한 더위였다. 셔틀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청설모가 사라졌다가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고, 논문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아무런 회한 없이 아스팔트에 스며든 청설모를 바라보았다. 보도블록에서 한발만 내디디면 청설모가 스며든 아스팔트 위였다. 해가 마지막 빛을 발하며 신축 아파트 건물 뒤로 넘어갈 즈음 나는 아스팔트 위로 발을 내디뎠다. 정류장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청설모의 사 앞으로 가서 바닥과 일체가 된 청설모를 내려다보았다. 떨어져서 볼 때는 아스팔트에 새겨진 무늬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무늬라는 말은 한낱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았다. 불현듯 청설모에게 일어났을 법했던 일들이 영사기 위에 돌아가는 필름처럼 뇌리에 스치고 지나갔다. 버스가 다가오는 것이 아닌데도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청설모를 보았다. 수업이 모두 끝났을 시간이었다. 이제 와서 캠퍼스에 가는 건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청설모가 내게 보여준 죽음을 떨쳐내기 위해, 한낮에 머금었던 더위를 음흉하게 뱉어내는 아스팔트 위를 질척 질척 밟고 올라갔다. 방금 전까지 회한 없던 마음이 어느덧 두려운 감정으로 변해, 아스팔트에 스며든 청설모가 뒤에서 날 시커멓게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날의 일은 나에게 죽음의 실제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 실제성이 두려웠고, 도망치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 실제성을 실감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실감하는데 반나절의 시간이 걸렸다. 그 반나절의 시간 동안 나의 사고 회로는 끊어져서 하얀 백지상태가 되었고, 태엽이 다시 감기기 시작하자 내 눈앞에 널브러진 일이 무슨 의미인지 자각하기 시작했다. 자각과 함께 시커먼 두려움이 입을 벌리고 나를 삼키려고 했다. 나는 올라가고, 올라가고 올라갔다. 그리고 캠퍼스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버스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버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오르막길 초입은 이미 청설모의 죽음이 잠식해버렸다.      


 청설모 사건 이후 운전을 하다가 도로 위에 로드킬을 당한 동물이 보이면 나는 의도적으로 눈을 피했다. 그들은 이미 죽었고, 나는 죽음과는 다른 영역에 있다고, 그러니까 너무 깊이 생각할 필요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죽음은 내게 차에 머리를 치인 고양이 한 마리를 보냈다. 어디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생의 한가운데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는 차를 세우고 어디선가 상자를 찾아와 길바닥에서 사지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버둥대며 눈알을 굴리는 고양이를 조심스럽게 상자 안으로 옮겼다. 단단했을 두개골은 이미 금이 나있었고, 그 사이로 머릿속의 내용물이 흘러나와 있었다. 병원에 데려가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나는 인근 공원의 나무 그늘 아래로 가서 고양이를 담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초여름의 미지근한 바람이 나뭇잎을 텁텁하게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상자 앞에 쪼그리고 앉아 고양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차로 치어놓고선 곧바로 병원에 데려가지 않은 인간 따위 용서하지 말라고 고양이에게 말했다. 그런 인간이라면 차라리 네가 다음 생에 그의 목숨을 가져다가 덤으로 더 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고양이는 나를 보지 않았다. 나만이 고양이의 눈을 열심히 쫒으며 사지 끝까지 기세 좋게 세력을 뻗친 죽음을 지켜보았다. 고양이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죽음이 모두 잠식한 몸은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죽음을 그곳에 그대로 둔 채, 천천히 걸어서 딸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차로 돌아갔다. 그리고 몇 년 뒤 어머님의 죽음 앞에서 나는 남편과 함께 습과 염을 지내며 내 손으로 직접 어머님을 입관해드렸다. 어머님에게서 나온 죽음은 어머님의 체구만큼이나 작고 서글펐다.       


  




 나를 찾아올 죽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본다. 이젠 청설모의 사체 앞에서 도망쳤듯이 도망칠 수 없다. 고양이를 나무 아래 두고 올 때부터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딸에게로 돌아가 담담하게 잘 보냈노라고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물론 가능 하다면, 벗어날 수만 있다면 있는 힘껏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그 대신 나는 매 순간 죽음을 기억하며 앞으로 나에게 다가올 죽음들을 미리 그려본다. 도망칠 수 없으니 실제적인 모습을 그려본다. 그런데 슬프다. 무섭고 그리고 슬프다.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


 얼마 전 어머님의 기일에 딸아이와 산소엘 갔는데 묘비에 새겨져 있는 딸아이의 이름이 신경 쓰였다. 다른 고인의 묘비에는 자식들의 이름과 손주들의 이름이 줄줄이 쓰여 있어 형제자매가 참 많구나, 외롭지 않겠구나 싶었는데 딸은 덩그마니 혼자였다. 안 되겠다, 나 오래 살아야겠다, 동쪽 하늘에서 맴돌고 있을 죽음을 향해 얘기했다. 앞으로 내가 지켜보고 목격하게 될 네가 한 둘이 아닐 텐데, 그때마다 넌 내가 도망치지도 못하게 붙잡아 둘 텐데, 나 하나쯤 딸아이를 위해 징그럽게 오래 산다고 네게 밑지는 장사는 아니잖니? 죽음을 향해 비아냥 거려 보았다. 짙은 터키색 천장을 머리 위에 두고 동쪽으로 난 창을 향해 경건하게 기도하는 그들과는 다르게, 비굴하게 간절하게 슬프게 어리광을 피웠다. 생의 한가운데 똬리를 틀고 있는 죽음에게,   

   

결국,

말을 걸었다.  

    

<나를 진정시켜 다오>

매거진의 이전글 不安宴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