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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그의 젊은 날의 열정이 나에게는 아리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다녀와 일을 하고 있었다.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가 찍혔다. '던' 이란다.

던은 내가 두 번째 앙코르와트에 갔을 때 사흘 동안 사원을 안내했던 친구.
스물한 살이었고 얼굴이 까맸고 축구를 좋아했고 사원에서 나를 기다린다고 해놓고 잠이 들어 나를 잃어버렸던 친구.
내가 앙코르와트가 좋아 그곳에 한 달 정도 있고 싶다고 했을 때 다시 오면 알려지지 않은 작은 사원에도 데려다준다고 했던.
다시 오게 되면 그땐 일반 숙소가 아니라 농담처럼 너의 집에 머물겠다고 했을 때 "다 좋은데 우리 집은 전기가 안 들어와서 어두워."라고 말했던.

국제전화를 걸어온 이가 던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해져 있는 그 몇 초 동안 나는 내가 돌아온 날짜를 헤아렸고 내가 두고 온 것이 있는지를 되돌아봤고 사원의 조각과 나무와 바람들을 떠올리느라 대답이 늦었다.
나는 웃을 수도 없었고, "왜 전화했어?"라고 물을 수도 없었고 "잘 지냈니?"라고 물을 수도 없어 싱겁게 말했다. "한국에 온 거야?" 아니라고. 캄보디아라고. 대뜸 그가 언제 올 거냐고 묻는다.
던은 "내가 다시 오게 되면"이라는 가정으로 그에게 수도 없이 물었던 질문들을 기억하고 내가 곧 올 줄 알았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그렇게 금방 돌아갈 거라고 믿었단 말인가. 나는 말을 잇지 못한다.

내가 오면 공항에 나와주겠다고 한다. 내가 오면 호수에 가서 수영하자고 한다. 나 오면 예쁜 여자 친구들도 많이 소개해줄 것이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타프롬 사원에도 꼭 가보자고 한다. 그렇게 쓸쓸히 전화를 끊고 세수를 하겠단 마음이 들어 욕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았는데 내 얼굴은 무엇으로 붉어져 있다. 그것이 앙코르와트를 감쌌던 노을 같기도 했고 앙코르와트를 적시던 아침 태양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것은 세수를 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을 붉었다. -   



친구에게 책 선물을 해줬더니 답례로 보내준 책이다. 여행기나 에세이류는 정말 피하고 싶었는데...

특히나 우리나라 작가 것은 너무 서정적이라 서점에 가서도 잘 보지 않았다. 왜일까. 정서 때문일까. 그저 우리나라 작가의 에세이는 언제나 어떤 아련함을 주는 것 같아 언젠가부터 무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내 내면의 어떤 공간을 내게 익숙한 방법으로가 아닌 그보다 조금 더 감정적으로 건드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에게는 오히려 건조한 듯, 차가운 듯, 자신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퍼석퍼석한 문체로 쓰인 외국 작가의 에세이가 맞았다. 읽을 때는 다른 감정이 들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떤 깊은 여운을 남기는 하루키의 "먼 북소리"같은 여행 에세이류 말이다.   

 

이 책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 작가들이 내포하고 있는 100% 아련함의 결정체가 녹아있는 에세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이 마음에 닿는 것은 역시 여행이라는 특수한 환경과 그 환경에서 내뿜는 특유의 냄새가 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선 앙코르와트 던만 맛보기로 보여줬지만 <멕시코 이발사>라는 소제목도 썩 마음에 들었다. 앙코르와트 던은 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안에서 불편한 자세로 자고 있는 아이에게 어깨를 내준 채 읽었던 부분이다.




마음이 고독했던 탓일까... 앙코르와트 던을 읽으며 던이라는 청년이 마음에 담고 있을 작가에 대한 그리움이 물씬 느껴졌다. 작가의 아련함이 아닌 던의 아련함이. 그런 느낌이 닿도록 의도하고 작가가 이 글을 쓴 것이라면 나는 감히 그 훌륭한 작가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부분에서 작가는 우리나라의 여느 작가와는 약간은 다른 색채를 가지고 여행기를 쓴 것도 같다.   


작가가 아무런 생각 없이 "다시 찾아오게 되면"이라고 내뱉은 말을 던은 얼마나 기쁘게 받아들였을까.

그는 이방의 친구가 앙코르와트를 떠난 순간부터 다시 재회하게 될 날을 기대하며 그 친구가 돌아올 때를 준비해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형제를 본 것처럼 던은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이 많으리라. 그의 해맑은 마음이 그대로 비친 전화 내용이 나의 마음을 울렸다. 그 해맑음 때문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기다리던 이방의 친구는 오지 않고 결국에는 그 친구의 말이 단순한 인사말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때 그가 느낄 씁쓸함과 체념이 고스란히 내 마음에 전해져 진동을 했다.

(끌림이 그의 첫 여행 에세이집이고 그 후 두 권의 여행 에세이집을 더 냈다고 하니, 나는 던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작가가 꼭 시간을 내어 다시 앙코르와트에 갔기를 바란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나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앙코르와트의 던을 생각하며 언니가 느끼고 있을 그리고 내가 느끼고 있는 "체념"을, 이유를 알 수 없는 空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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