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향수병

-환영




아침에 눈을 뜨자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왜지? 어제 특별히 무리를 한 것도 아니고,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감기인가?  이마를 어루만지며 차가운 얼음물을 단숨에 들이켠다.


"그건 네가 너무 이상적이기 때문이야." 문득 친구가 한 말이 떠오른다.


아니야, 이상적인 것과 열은 아무런 상관이 없어.


찬장에서 열을 내려주는 붉은색 시럽을 꺼내 계량스푼으로 정확히 5ml를 덜어 마신다.

잠깐만 더 누워있으면 될 거야.

침대에 길게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열이 나는데 혼자라는 건 어쩐지 좀 외로운 것 같다.

하지만 딱히 부를만한 사람도 없고 열이 더 심해질 것 같지는 않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상한 그림자들이 어른거린다.


저건 뭐지... 내 모습이 빛에 반사되어서 천장에 어른거리는 것인가.


약기운 때문에 정신이 몽롱해진다.

아, 일어나서 일해야 하는데.


하지만 천장에서 어른거리는 빛이 너무 아름다워서 일어나기가 싫다.

저건 뭐지.

내 모습 같기도 하고...... 어린 시절에 놀러 가곤 했던 카스피해구나.

호수가 너무 아름답게 빛난다.

모래사장도 너무 곱고, 모든 것이 햇살에 반짝인다.

드디어 혼자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모습이구나.

신나게 웃으며 두 발 자전거를 타는 모습.

저 사람은 내가 몰래 좋아했던 앞집 오빠.

피부가 까무잡잡한 이국적인 사람......

카스피해의 파도가 높게 인다.


의식이 점점 몽롱해진다.

천장에는 이제 땅이 쩍쩍 갈라진 중동의 사막이 비친다.


뜨거운 열기 때문에 땅 위로 신기루가 보인다.

신기루 너머에는 작은 촌락이 듬성듬성 서있고,

흙으로 바른 회벽 앞에 온몸을 차도르로 두른 아줌마가 큰 솥에 양고기 스튜를 끓이고 있다.

화덕에서는 납작하면서 쫄깃한 빵이 김을 모락모락 내면서 구워지고 있다.  

뜨거운 사막에 커다란 지프차가 들어오니까 촌락 사람들이 모두 모여든다.

그들 눈에는 내 모습이, 가족들의 모습이 외계인 같다.

이방인.

가는 곳마다 까만 눈동자의 아이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졸졸 쫓아온다.

차도르를 뒤집어쓴 아주머니의 양고기 스튜 맛은 정말 일품이다.


아아... 이건 열이 아니구나. 이건, 그저 향수병이야.


이상도 아니고, 그저 그리워서. 유년이 그리워서, 이란이 그리워서, 그때가 너무 그리워서 열이 나는 거야.

조금만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눈을 감고 어둠을 응시한다.

어둠 속에서 과거의 환영이 엷은 띠를 그리며 의식을 끌어당긴다.

가라앉는다.

이대로. 





매거진의 이전글 화이트 아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