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김치가 익어간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익어가는 사람들에게




친구가 이사를 간다고 한다. 결혼을 하고 6-7년을 좁은 빌라에서 신혼생활을 한 친구다. 결혼하기 전에는 내가 꿈도 꾸지 못한 해외 유학을 다녀오고, 친척이 사는 하와이에 긴 방문을 하고 서울 한복판에 영어학원을 차리고 원장을 한 친구였다. 그런 아이가 전파 활동을 하는 사람을 만나 좁고 허름한 빌라에 신혼살림을 차렸으니 주변의 지인들이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친구가 좁은 빌라든 휘황찬란한 궁궐이든 개의치 않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도 그때는 아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을는지도 모른다. 


김치를 담을 때는 그렇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배추니 무 갓, 마늘, 고추, 생강을 가져다가 소금에 절이고 씻고 자르고 다진다. 그러곤 갈 길 잃은 저들을  한통속에 넣고 버무리기까지 한다. 아직 자기 개성을 버리지 못한 배추와 무, 갖은양념들이 처음엔 강하게 저항하며 저만의 날 것 그대로의 맛을 어떻게든 내려고 하지만 하루 이틀 지나다 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썩둑썩뚝 잘려 쓰라리게 저려진 자리가 점점 아물며 다른 맛을 내는 것이다. 속에서부터 천천히 보글보글 익어가며 깊이 있으면서도 산뜻한 맛으로 탈바꿈한다. 


결혼도 그런 것 같다. 


좁은 빌라에 신혼살림을 차린 친구가 신랑한테 매일 아침을 차려줘야 한다느니 반찬을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느니 신랑이 자기 마음도 모르고, 아니 아예 여자 마음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다며 전화로 다툰 얘기를 들려줬을 땐 딱 갓 담은 김치였다. 결혼하기 전의 발랄함과 도전적인 성격을 그대로 안은 채 김치가 되려고 커다란 대야에 뛰어들었는데 아뿔싸! 대야 안의 세상은 그야말로 별천지다. 그리고 그 별천지에 서툰 조언을 달아준 나는 담은 지 일주일 남짓 된 어색한 김치였다. 어색한 김치가 보기엔 그래도 갓 담은 김치는 여전히 생기 있고 활기가 넘쳐서  부러웠지만 막상 갓담은 김치는 썩둑 잘린 자리를 잃고 싶지 않아 발버둥 치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 뒤로 친구한테는 많은 일이 있었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시간이 주는 시련은 그 친구의 잘려나간 자리를 더욱 아리게 했고, 결혼생활이라는 틀 안에서 인연을 맺게 된 남편과 새로운 식구들 그리고 믿음으로부터 위안을 얻고 상처를 치유받았다. 


친구는 지금 한 달이 넘도록 새 집에 들일 소파를 고르지 못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나에게 카톡으로 소파 사진을 보내며 이게 더 저렴하다느니 중고 사이트를 이용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 같다느니 엎치락뒤치락 고민을 한다. 그런데 내 기억 속 친구는 청년일 때 선택에 망설임이 없었다. 


한 번은 큰 결심을 했다는 듯 친구가 구매하기로 마음을 굳힌 소파 사진을 보내왔다. 그동안에 서로 카톡으로 의견을 나눴던 터라 나는 친구가 보내온 사진을 보고 대답을 조금 망설였다. 우리가 얘기했던 소파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대답이 없자 친구는 소심하게 결심을 철회한다. 3인용을 사기로 했는데 4인용이라는 이유로. 청년일 때와는 다르게 답글이 없는 카톡을 보며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소심하게 망설이다가 결심을 뒤집는 친구를 보고  '아, 참 이쁘다 내 친구.'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친구는 어색한 시간을 지나 깊으면서도 산뜻한 맛을 내는 김치로 익어가고 있었다.


잘려나간 자리를 잃고 싶지 않아 푸릇푸릇한 맛을 한껏 내뿜었던 갓 담은 김치가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과 이 맛이 좋을까 저 맛이 좋을까 허울 없는 마음으로 얘기하며 상처 난 자리를 시간과 믿음이라는 양념으로  다독여 맛을 낸 김치.


친구가 새 집으로 이사를 가서 좋다. 좁고 허름한 빌라에서 나와서가 아니라 새로 갈 집에서는 또 얼마나 깊게 깊게 익어갈까 그 모습이, 맛이 그만 궁금해져 버려서ㅡ. 


김치가 익어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향수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