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 병을 고치려고 병과 싸운다는 뜻이다.
나에겐 심한 천식과 녹내장, 고혈압, 유방과 신장, 자궁에 추적 관찰이 필요한 양성종양이 있다. 이 것이 내가 싸우고 있는 병은 아니다.
오늘, 아침이 가까운 이른 새벽에 수면제를 먹었다. 약기운에 취해 11시 가까운 시간에 비타민D를 쐬야 한다는 강박감에 커튼을 열었다.
오랜만에 본 햇볕에 미간과 등골이 짜릿하다.
짜릿한 세포 속에 햇빛 속에 마주했던 기억이 파고든다.
또 다시 올해 3월로 돌아간다.
17세 첫 째의 유학은 일찌감치 결정된 후였다. 아이는 엄마표 공부에도 잘 따라와 특목고를 준비했으나 면접에서 낙방하고 본인의 미래를 선무당처럼 점치며 결정해 놓았더랬다.
나와 한 공부에 얽매여 그랬던가. 죄책감이 밀려와 아이의 결정에 찬성을 해버렸다.
고1 첫 모의고사에서 아이는 언어영역, 외국어영역을 전교 1등을 받아왔다.
'그래. 잘 키웠어. 이제 아이가 해보고 싶은 걸 해줘도 돼.'
기억은 두 달을 뛰어넘는다. 5월이다.
아이는 생애 첫 남자 친구를 만났다.
가정폭력을 겪고 양극성장애를 겪어 정신과 약을 복용해야만 일상생활이 가능한 아이였다.
"엄마가. 널 좋아해. 우리 딸이 좋아할 아이라면 난 그만큼 널 좋아한단다."
내가 딸아이 남자 친구에게 한 이야기였다. 진심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 저 죽을 거예요. 제가 죽으면 우리 가족이 다 나아지겠죠?"
문자였다. 한강에 뛰어들겠다는 그 아이를 내 아이인 것처럼 달래야 했다.
"살자. 살아내자."
문자는 그 아이가 집에 들어갈 때까지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집에 들어간 걸 확인하고 눈물이 터졌다.
아이는 투병하고 있었다. 가족과 본인의 병으로, 그런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살자"라는 말밖에 없었고, 딸에게 헤어짐을 강요하는 길 뿐이었다.
여자 친구의 엄마에게 죽어버리겠다고 말하는 남자 친구를 난 허용할 수 없었다.
내가 그 모든 죽음의 암시를 수용하더라도 내 딸아이가 그 말을 듣게 할 수 없었다.
유학을 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딸아이는 어차피 유학 가면 안 보고 멀어지면 헤어지게 될 것을 아픈 아이를 혼자 두는 게 속상하다 하였다.
아니었다.
난 나치 시절의 독일군이나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군인 같은 사람이었다. 철저하게 울타리 안에선 강해야 한다고 교육받아 외향적으론 강하지만 개인이 되었을 땐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말이다.
지금이다. 지금이 강하게 아이들을 뗴어놓을 수 있는 시기다. 아이를 유학 보내고선 아무것 도 못 할 사람이란 걸 나 스스로는 알고 있었다.
딸아이에게 강요하고 강요하고 주입하고 주입했다.
그럴수록 남자 친구의 자살 협박은 강도가 심해졌다.
딸은 강요한 날 원망하며 유학을 떠났다. 자연스레 남자 친구와도 나와도 헤어졌다.
그런데 딸을 보내고 내게 병이 찾아왔다.
공황장애였다. 같은 또래의 교복을 입은 사람만 보아도 나에게 자살을 암시할 것 같은 환각에 빠져든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교복 입은 사람이 튀어나와 본인에게 칼을 들이밀고 "나 살아야 돼요?"라고 물을 것 같다. 운전도, 택시도, 버스도... 식당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숱한 병원에 다니면서, 아이의 선천성 병에 큰 병원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내 아픔은 아픔이 아닌 것을 익히 경험하며 살았는데...
투병이다.
싸우고 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맴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아이가 내게 했던 말들이,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 무심코 했던 말들이 죽지 않고 곁에 맴돌고 있다.
투병 중인 내가
투병 중일 그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인생엔 각자 안고 가야 할 돌멩이가 있다고 한단다. 세상 편해 보이는 자의 주머니에도 수 십 개의 돌멩이가 들어있을 수 있단다."
너는 나의 돌멩이이고, 너에게 나와 내 딸아이도 돌멩이일 텐데,
우리 중병은 아닐진데, 얕은 병과의 투병이라도 멀리서라도 같이 이겨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