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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CONN 에콘 Mar 01. 2022

장려라는 이름의 강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날 공교롭게도 난 아이들과 용산 전쟁기념관을 다녀왔다. 코로나 시국에 미리 예약을 해야 입장이 가능했으므로 전쟁 발발일에 맞춰 어떠한 전쟁도 인도주의 측면에서 옳지 않다는 교훈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라고는 일도 담겨있지 않았다. 전쟁 책과 전쟁 다큐에 빠져있는 둘째를 위해 계획했지만 방학인데도 집에만 있어 지루했던 첫째도 오랜만의 외출에 동참했다.

용산으로 향하는 30여 분의 시간 동안 차창밖으로는 얼마 남지 않은 대선 시국의 현란한 현수막들이 주유소 앞 공기인형처럼 나풀거렸다.

선거벽보와 현수막을 한참 응시하던 첫째가 "엄마는 누구 뽑을 거야?"라는 질문을 던졌다. 난 그동안 아이에게 정치적 성향이 담긴 말을 삼가해 왔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해주신 정치에 대한 이야기들이 성숙하려면 갈 길이 멀었던 나에게 의식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채 그대로 뇌리에 박혀, 성년이 되고 내 손으로 첫 선거를 치를 때 부모님의 정치적 발언들이 내 무의식 속에 얼마큼 무섭게 자리하고 있었는지를 몸소 느꼈었기에.. 그리고 부모님의 정치적 이념과 다른 것을 알아가고 직시하는 데 까지 얼마큼의 시간이 소요됐는지 알기에 부모의 정치적 성향을 담은  "엄마는 이런 사람이 좋아. 이런 면을 보렴. 이런 것을 네게 장려한단다"라는 말이 아이에게 '장려라는 이름의 강요'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음.. 정치란... 경제의 두 가지 축인 성장과 분배 중 어떤 것에 더 초점을 맞춰 나라를 이끌어 갈 것이냐라는 말 같아. 그러니까 지금 자신 혹은 사회, 국가가 당면한 경제적 측면 중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 본인 스스로 판가름해서 본인이 내린 결론에 맞추어 선거에 임하면 된다고 생각해. 그래서 엄마는 아직도 고민 중이란다."라는 모호한 답변만을 늘어놓고 행여 내 성향이 드러나는 말을 하나라도 섞었는지 곱씹으며 이야기를 대충 마무리 지었다.


아이들의 유아시절 RC카 조종에 푹 빠져있던 첫째를 데리고 용산 전쟁기념관의 너른 앞마당을 찾았던 후론 10년 만의 방문이었다. 첫째는 용사들의 조각상과 기념비들 사이를 리모컨 하나를 들고 누볐었고, 본인의 다리 사용법을 잘 몰라 멈출 줄 모르고 오직 직진만 하던 둘째는 탱크와 깃발을 보며 '우와'만 연발했었는데 10년 새 아이들의 전쟁기념관 이용법은 크게 달라져있었다.


첫째는 전쟁 역사실의 선사시대 유물부터 본인의 암기했던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옳게 외우고 있는지를 각인하기 시작했다. 삼국시대를 지나 조선 중기 전쟁 역사를 접하자 급기야 '태정태세문단세'를 동원해 '1592 선조 임진왜란, 1636 인조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후금은 청 등'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시험에 나올 것만 골라 찾아보고 암기를 정비하는 녀석에게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막막했다.

말문이 막히게 한 건 둘째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그 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곳곳에 숨어있는 영상물 상영 부스를 잘도 찾아내는지 각 관마다 설치되어 있는 영상 기록관에서 대하사극의 한 장면 같은 장군들의 출정 장면들을 섭렵하고 장군들의 영웅심을 본인의 몸과 마음에 그득 장착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3시간 가까이 아이들을 쫓아다니니 슬슬 지쳐올 때쯤 드디어 마지막 관람 순서인 '해외파병실'에 도착했다. 가장 근래의 전쟁이기도 하고 그나마 나의 기억에 가장 근접해 있는 전쟁에 관한 관람실이라 관심 있게 보게 되었다. 그중 내 이목을 끈 것은 베트남 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베트남 전에 파병된 한국군인들은 30만 명으로 전쟁의 주인공 역할을 자처했던 미국 다음을 기록했다는 것과 한국군인들의 평화에 대한 의지와 대민지원의 노력 등을 이유로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계에 드높일 수 있었던 전쟁이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지. 그랬었지. 박정희 대통령의 월남 파병으로 인해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여 더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던 거지. 그런데? 왜 이리도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군인을 파병한 것인지, 그 뒷면에 가려진 박정희 대통령의 야심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제네바협약을 무시한 채 행해진 미군들의 노근리 학살에는 분노했던 우리가,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고 논란이 되었던 베트남전의 민간인 학살 이야기는 단 한 줄의 설명도 없는 거지? 왜 전쟁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참전군인들의 전인류에 대한 동료애와 영웅적 서사에 맞춘 측면에서만 보여주려고 하는 걸까? 아직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이 자료부족 등의 이유로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이라 기술할 수 없는 내용이라면 적어도 이런 관련 논란들이 있었고, 이런 논란들도 빚어질 수 있다는 전쟁 속 야만이라는 과오만이라도 내비친다면 다시는 일어 나면 안 될 어둡고 더러운 역사적 측면을 통해 이보다 더 인도주의적인 역사적 가르침은 없지 않을까?'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 아니고, 내 아이들에게 어떻게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가르쳐 주어야 할지 생각의 근원에서 폭풍우 같은 것이 일어나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멍한 마음으로 기념관을 나선 오후 무렵부터는 포털사이트에 우크라이나 관련 기사들의 방향성이 정해져 있는 듯했다. 그 기사 밑에는 극악무도한 전쟁을 일으킨 푸틴에 대한 혐오와 바위 대 달걀 같은 싸움 양상에서도 끝까지 우크라이나를 지키겠다는 질렌스키 대통령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기나긴 댓글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당연하다! 그 어떤 전쟁이라도 인도주의적 측면을 우선하여 생각하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에 푸틴을 욕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 기사들에서 2014년 일어난 우크라이나 내의 작은 도네츠스크, 루간스크 공화국 선포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공화국 선포로 말미암아 벌어진 전쟁들과 서방세계 자유진영 국가들이 그들에게 끼치고자 하고, 끼쳤던 영향력에 대한 이야기들과 그 여파가 오늘의 전쟁까지 미친 결과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더더욱 그랬다. 간혹 우크라이나 질렌스키 대통령이 과거 코미디언 출신이었다는 내용과 그것을 양념 삼아 지금의 사태를 해석하는 전쟁의 핵심에서는 빼놓아도 될 이야기들이 눈에 띌 뿐이었다.


난 아이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 여기며 그것을 잣대 삼아 전쟁의 정당성을 따지기는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이 양면의 역사를 다 기억하고 배우길 원한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책을 읽고 남성 위주의 관점에서 해부되어 왔던 전쟁 이야기를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도 작은 의미에서는 양면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이런 역사의 이면도 알아보렴'이라는 장려를 하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불쑥 이면의 시선으로 접근한 책을 들이밀기도 우스워보일 것 같았다.


전쟁기념관에서의 의도치 않은 만보 걷기 덕분인지 아이들의 체력은 바닥이 나있었다. 첫째는 지친 몸을 이끌고 책상 앞에 앉았고 둘째는 본인이 본 장군들의 멋진 활약상과 파병군들의 멋진 제복을 떠올리며 "너무 좋았어"를 연발하고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첫째의 꼭 닫힌 문 너머로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 뛰어들어가니 책상 위에는 최상위, 블랙라벨 같은 이름만으로도 무시무시한 공포심을 조장하는 수학 문제집들이 놓여있고 지면 위에는 틀렸다는 빨간 체크표시 몇 개가 선명했다. 아이는 나를 와락 안더니 더 크게 울며 말했다. "두 문제를 공들여 한 시간이나 풀었어. 그런데 그 두 문제 다 틀렸어. 잘하고 싶어. 공부 말이야. 친구들을 이기고 싶고, 어려운 문제도 다 맞아서 스스로 잘했다고 칭찬하고 싶은데...."


사교육 없이 네 힘 하나만으로 대한민국에서 이뤄지는 공부를 파고드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위로해 주었지만 그런 말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그렁거렸다. 한참을 이런 말로도 저런 말로도 다독여도 아이는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를 찾지 못했다.

"이기고 싶다고 했지? 친구들 말이야. 친구들을 공부로 이기고 싶다고 했잖아. 그럼 우리 힘든 수학 공부 말고 진짜 공부해볼까?"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그게 뭔데?"

"수학 공부 힘드니까 며칠 접어놓고 대신 우리 이번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공부를 해 보는 거야. 책도 찾아보고 인터넷도 뒤져보는 거지. 오랜 시간 각 나라의 역사를 연구해 온 사람들의 자료나 국제, 경제, 문화, 사회적인 측면에서 양국의 관계를 되짚어 본 글들이 있다면 아주 좋을 것 같아. 니 스스로 복잡하게 얽힌 전쟁에 대한 공부를 해본다면 네 친구들은 모르는 것들이니까 당연히 네가 친구들을 이기는 것이고 말이야!”


지친 수학 공부를 잠시 접고 본인이 좋아하는 글 읽기를 장려해주는 엄마를 첫째는 고마워했다. 비록 이번 글 읽기 장려가 세상의 이면도 가르치고 싶어 하는 자기 엄마의 욕심이 내재되어 있다는 걸 아이는 눈치챘을까?

첫째가 며칠 뒤, 동슬라브족의 역사를 꿰고 60,70년 대 패권경쟁 시기는 물론이고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한 배경이 된 경제위기 시기까지 줄줄이 알아내리라는 거대한 기대감까지는 없다. 하지만 두 문제를 한 시간 풀 열정을 지닌 첫째가 러시아에서 시작돼 우크라이나를 지나 유럽으로 이어지고 있는 송유관이 미국과 EU 경제공동체에 어떤 의미인지 정도는 운이 좋으면 알아내주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을 품어본다.

셀 수 없이 쏟아지는 같은 내용의 전쟁 관련 기사들이 '이 쪽 면만 보세요~쭉~'이라고 장려라는 가면을 쓴 강요를 하고 있다면 아이 스스로 찾아보게 한 엄마의 장려는 강요가 아닌 진짜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세상의 이면도 배울 용기를 갖게 해 줄 공부가 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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