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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CONN 에콘 Feb 21. 2022

죽음 앞에 선 개미와 베짱이

개미는 매몰차게 베짱이를 쫓아낸 후 혀를 찼다. 인생 헛되게 사는 놈이라고 욕도 한 판 시원하게 내뱉었다. 그럴수록 더욱 자신을 채찍질해가며 열심히 일만 할 것을 각오했다. 개미의 이런 각오는 몇십 년간 계속됐고 결과는 떵떵거릴 만큼의 재벌 같은 부는 아니더라도 노후 걱정일랑 개나 줘도 되는 부를 거머쥐었다. 아이들 다 좋은 대학 보내 공기업, 대기업 취직시켜 남들의 찬사도 받았다. 남부럽지 않은 중형 평수의 아파트와 작지만 월세가 꽤 나오는 5층 건물도 마련했다. 쉬는 법을 배우지 못 한 개미는 60이 넘어서도 자린고비처럼 아끼며 노역이 필요한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티끌 같은 돈을 모았다. 그런데 너무 일만 해서일까. 60 중반, 건강검진에서 췌장암 말기를 선고받았다. 지독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했다. 그동안 깨알같이 들어놓은 보험에서 진단금도 두둑이 나오고 수술비, 병원비 다 보장된다지만 의사는 이제 더 이상 손쓸 방도가 없으니 남은 인생을 가족과 함께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죽음이란 말을 에둘러 표현하곤 개미의 방을 떠났다. 의사의 뒷모습 위로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30여 년 전 내쫓았던 베짱이가 떠올랐다. '그 친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처럼 일만 하다 병들어 죽진 않았을 테고, 남들을 기분 좋게 해주는 음악이란 장기가 있었으니 난 잘 모르는 음악의 세계에선 이름 날리며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지 않을까?' 개미가 본인 삶의 후회를 가득 담아 베짱이 생각에 잠긴 그 순간, 개미의 아이들과 며느리, 사위들은 모두 모여 건물과 아파트가 누구에게 돌아가게 될 것인지 본인들의 그간 효도를 서로보다 높이 평가하느라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통누리요술램프 동화책의 그림입니다.



베짱이는 얼마나 굶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온 시야가 뿌옇고 메고 있던 기타도 천근만근 느껴져 몇 번을 떨어뜨렸다. 기타를 고쳐 메며 개미 욕을 곱씹었다. 그 많은 것들을 쌓아두고 조금의 선의도 베풀지 못하는 악질 중의 악질이라고! 하지만 허기가 목 끝을 넘어 쉰 탄식으로 뿜어져 나올 때는 무릎이라도 꿇고 간청해 볼 것을 바닥까지 굽히지 못한 자신의 비루한 자존심을 원망했다. 그다음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눈 쌓인 길가 어딘가에서 의식을 잃었던 모양이다. 지나가던 행인이 신고해 준 덕에 베짱이는 국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최저생계비이지만 원하는 음악을 마음껏 하며 길거리 공연 후,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간간히 입에 풀칠이 가능했다. 길 위에서 음악을 하며 만난 여자 친구가 있었지만 사랑의 결실인 아이 하나만을 남겨둔 채 가난을 꼬집으며 돈 잘 버는 사람 만나 떠나버렸다. 아이가 크면서 소비해야 하는 돈은 더 많았지만 근성 부족으로 주변의 다른 뮤지션들처럼 유튜브를 한다거나 끊임없이 작곡을 해서 소득 수준이 크게 나아지는 드라마틱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학창 시절 내내 베짱이의 아이는 이름 대신 '기생수'(기초생활수급자)란 별명으로 불리며 아빠의 경제적 무능력에 대한 원망을 몹시도 많이 쏟아부었지만 음악을 하는 사람의 흥과 가오를 버릴 수 없다는 것이 베짱이가 아이에게 내민 변명이었다. 성인이 된 아이는 부자가 된 엄마를 찾겠다며 떠나버렸고, 베짱이는 늙어가는 몸을 이끌고 또다시 거리에 기타를 메고 나서지만 본인이 흥에 겹지 않은 심리상태인지라 동전 몇 개가 수익의 전부인 날이 허다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좁은 방 하나가 세상의 전부인 듯 외로운 은둔자처럼 처박혀 지냈다. 잊고 살던 개미가 떠오른 건 그즈음이었다. '그 친구는 잘 살고 있겠지? 그렇게 부지런한 친구였으니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애한테 못 해줘서 손가락질받을 걱정 없이 풍요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지 않을까?' 이런 후회라도 누군가와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베짱이는 기타 줄 하나도 튕기지 못할 만큼 지독하게도 외로웠다.


 

통누리요술램프 동화책의 그림입니다.


-40이 넘어 비로소 생각해 보는 어떻게 살 것인가.


갓 마흔이 된 해였다. 둘째가 울었다. 누나 빵이 더 큰 거 보니 누나를 더 사랑한다고, 첫째는 빵까짓것 중요하지 않다고 대신 따져 물었다. 친구들의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의 잣대를.. 그걸 듣고 있는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난 내 빵이 더 크지 않아도 되고, 더구나 그걸로 사랑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며, 내 주변인의 행동은 이미 관심 밖인 경제적 위상만을 따지는 삶을 살고 있었다. 사랑 확인과 정의로운 행동에 대한 의구심도 잊은 채 돈, 돈 거리는데 시간을 쓰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라면 아이들에게 삶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줄 수 있을까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즈음 한 생각이 죽음이 가까워진 개미와 베짱이의 후회스러운 이야기였다. 소비로 스트레스를 푸는 버릇에 개미처럼 알뜰살뜰 모으진 못 했지만 시간을 쪼개어 아껴 쓰는 면에서는 난 개미 조상님쯤 되겠다. 잠시도 맘 편히 못 쉬는 성격 때문에 한 시간이 멀다 하고 할 일들의 알람이 울리고, 그날 계획한 일을 끝내지 못하면 잠을 포기하며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누구나 태어나면서 수명이라는 모래시계를 머리 위에 뒤집어 얹고 인생 레이스를 시작하는데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모래시계의 균일한 모래알이 두려워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도 컸다. 간혹 잠시라도 멈추고 쉬고 싶다 생각하더라도 도통 어떻게 해야 제대로 쉬는 것인지 알쏭달쏭하기 그지없었다. 친한 사람을 만나 커피잔 사이에 두고 수다를 떨고, 함께 콘서트나 공연을 관람하며 문화생활을 하는 그런 것? 하지만 그런 순간에 조차 머릿속으로는 돌아가서 할 일들을 되뇌고 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제대로 쉬지를 못 하니 정작 큰 에너지가 필요한 일들을 할 때는 실수 연발이었으니... 계속 고민들이 이어졌다. 엄청난 스트레스로 인해 죽음 앞에 서서 제대로 삶을 즐기지 못했다고 후회하며 가족들에게 지독했던 인간이라는 평을 받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성격상 베짱이처럼 여유에 심취해 있으면 불안해서 정신병이 날 지경이니 더 늦지 않은 40대에는 단 한 번의 삶,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명쾌한 정답을 얻고 싶었다.


-T.P.O에 맞는 개미와 베짱이라는 패션


정답을 찾아 헤맸지만 '워라벨'이라는 두루뭉술한 단답형 답만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일과 삶의 균형이 적정점을 이룬  굴러가는 것일까. 의외로 머지않은 시간, 어느 정도의 답은 찾게 되었다. 비건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비건을 시작하고 나서 바뀐  식생활과 건강수치만은 아니었다. 미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오늘 하루도 지구와 환경을 위해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해냈다는 것에 자신을 다독이고 칭찬해 주는 여유가 생겼다. 누군가는 쓸데없는 짓이라 손가락질하는 비건이지만 육류뿐 아니라 쓰레기 같은 모든 소비를 줄이며 소신을 지킨다는  자체가  과하게 격려해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지독하게 시간을 아껴  , 여유를 부리는 건데도 시간낭비에 대한 불안감은 간혹 병처럼 도졌다. 그때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것인지 정확히 정의 내리기로 했다. 그렇게 찾은 답은 T(time), P(place), O(occasion) 맞춰 열심과 여유의 효용을 극대화시키자는 것이었다. 함께 사는 가족이나 지인과의 만남이라는 시간과 상황, 그들과의 공간에서는 열심을 부리지 않고, 주어진 업무량을 결과로 보여줘야 하는 시간과 상황, 공간에서는 여유를 부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도 두루뭉술한  아니냐 싶겠지만 T.P.O 따지니 쉬는 시간에도 혼잣말로  일을 되뇌던 버릇이 사라졌고, 일하는 시간에 정확히 해낼  있는 지혜가 생겼다.  마디로 일할 때는 개미의 패션을  때는 베짱이의 패션을 걸쳤다. 함께 하는 가족들도    불안을 공유하지 않아도 되어서 행복하고 정확한 일처리로 좋은 평가가 늘어났다.


지난 며칠 동안 260여 명의 사람에게 비건 빵 1300여 개를 만들어 팔았다. 물론 그 며칠간 개미의 옷을 벗지 않은 채로 말이다. 혼자 운영하는 일인 베이커리인지라 과도한 분량의 일로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지만 비건 빵을 접한 사람들이 그 빵을 먹는 순간만큼은 환경을 지키는데 일조할 수 있게 했다는 자긍심과 이번 달은 작업실 월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뿌듯함에 오늘은 작업실 문을 잠그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베짱이의 옷을 걸치고 있다.


이렇게 그때그때 골라가며 잘 맞는 옷을 입고 살다가 머리 위 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알이 떨어지면,  그래도 자~알 산 인생이라고 기꺼이 겸허한 마음으로 마지막 패션이 되어줄 수의를 후회없이 입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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