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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CONN 에콘 Jan 06. 2022

비건의 샤넬 가방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야 하는데요. 그다음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고, 여섯 정거장을 가면 극락(엘리시움)이라는 곳에서 내리라고 하더군요."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에서 주인공 블랑쉬가 풍족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고향에서 집안의 몰락을 겪고 결혼한 동생 스텔라가 살고 있는 뉴올리언스에 가는 기차에 몸을 실으며 하는 말이다.



30대 중반, 1년의 3분의 2는 출장을 가 있는 남편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이의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압박이, 조금씩 짙어지는 눈가 주름이 나의 삶을 바로 응시하는 직관력을 흐리고 있었다. 내가 주인이던 강한 나는 온 데 간데없고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홀로 지키며 나이 들어가는 외로운 셰퍼트 한 마리였다.


 '그래, 20대는 외모, 30대는 아이, 40이 넘은 중년에는 남편의 재력을 과시하며 사는 게 잘 사는 거 아니겠어? 외로우면 외로움을 채우면 되지.'  

이런 개똥 같은 생각을 머릿속에 주입하며 블랑쉬가 타고 파멸의 길로 향하던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에 올라탔다.

때마침 남편의 부재와 맞바꾼 가계소득은 정점을 찍고 있었고, 사교육을 시키지 않아 여윳돈이라는 게 생겼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백화점으로 향했다. 옷장이 터져나가 베란다에 쌓아 놓아도 부족할 만큼의 옷을 사고, 부엌이며 마루며 먼지가 평평한 곳에 내려앉을 곳 없이 잡동사니들을 들여놓았다.


그 물건이 필요한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 물건을 계산할 때의 풍만해진 부푼 마음 하나면 충분했다. 심지어 얼마나 그 부푼 마음만을 챙겼는지 계산하고 물건을 들고 오지 않아 직원이 쫓아온 경험도 꽤 된다.

이쯤 되면 병인 것을 깨달았어야 하는데 이것저것 사들이는 것의 감정적 효용이 감소하자 명품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모든 여자들의 워너비 1위 가방이라는 샤넬 가방, 프랑스 수탉이 왼쪽 팔뚝에 떡하니 붙어있는 몽클레어 패딩을 모으기 시작했다. 샤넬을 메고 몽클을 입고 나가면 마치 내가 그 브랜드의 CEO가 되어 온 세상 부를 다 짊어진 것만 같았다.

침대에 누우면 천정이 샤넬 매장으로 바뀌었다. 웃음 띤 직원이 페리에 음료를 서빙하고 한편에 선 다른 직원이 까멜리아로 치장한 쇼핑백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방의 포장을 기다리며 다리를 꼬고 앉은 천정 속 나는 그들의 환대를 내 영혼에 대한 극찬 인양 느끼며 잠을 청했다.


다시 블랑쉬의 대사다.

"버번 가에 있는 중국 가게에서 이 멋진 색종이 등을 샀어요. 저 전구에 씌워주세요! 부탁이에요."

"남성스러운 말이나 천박한 행동처럼 갓이 없는 알전구는 참지 못하겠어요."

"나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아요.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말해요. 그런데 그게 죄라면 달게 벌을 받겠어요! 불 켜지 말아요!!!"

블랑쉬는 잃어버린 가문의 영광과 사랑에 대한 상실감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허상을 좇는데, 자신의 현실을 그대로 비출 것만 같은 밝은 전구를 극도로 두려워하며 갓을 씌운다.

내가 딱 블랑쉬였다. 허무와 허망으로 휩싸인 저질 인격을 명품이란 갓을 씌워 가렸다.

나라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좋은 물건을 많이 가진 경제적으로도 심적으로도 풍요롭게 자~알 사는 여자라는 진실이고 싶은 것들을 드러냈다.

누군가가 내 허울을 벗기고 깊은 곳의 외로움을 들춰낼까 봐 겁이 날수록 샤넬의 개수는 늘어났다.

그 당시 내 모든 행동과 생각에는 물질적 가치가 주는 마약 같은 쾌락만이 존재했다. 그 쾌락의 감흥이 나를 보호해 준다 믿었다. 이제 곧 묘지라는 이름의 전차로 갈아타려던 순간이었다.


그즈음, 브런치 첫 글  '응원이 필요한 도전기'에서 밝혔던 것처럼 우연한 기회에 비건이 되었다. 멋 모르고 도육의 장면을 피하고자 시작한 초기에는 고기만 먹지 않으면 되는 줄 알고 가죽제품이나 패딩을 구입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비건에 대해 하나씩 배워가고 건강과 환경에 대해 눈뜨게 되면서 내 소비 지랄은 자연스럽게 멈추었다. 지랄 맞았던 마음속 과욕의 자리에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가치와 조화가 먼저인 삶이 자리했다. 좋은 물건을 가졌다고 부러워하던 사람들을 만날 때보다 비건을 만나 제로 웨이스트와 환경 지향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즐겁다.

그 시절 샤넬과 몽클은 전리품처럼 내 곁에 있지만 부끄럽지 않다.

친구들과 모여 앉은자리에서 난 스스럼없이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위에 올라탔던 그 시기를 대가리에 똥찼었다고 표현한다.

지나간 과거가 나를 결정하는 모든 것이라면 정신이 바닥을 찍었던 과거의 난 인간쓰레기다. 하지만 바닥까지 닿았기에 과감히 딛고 올라선 지금의 삶으로 정의하는 것이라면 이제는 꽤 괜찮은 사람 같다. 이제는 그 돈으로 기부를 하고 환경 지향적인 것들을 소비한다. 장바구니에 기름기 가득한 고기 대신 푸릇푸릇한 채소를 가득 담아 그럴싸하게 멋들어진 식탁을 차릴 줄 알고, 레깅스에 면 티 하나, 에코백을 메고 나서도 충분히 자~알 사는 여자로 보인다고 믿는다. 내가 품은 가치를 더 많이 알리고자 비건 빵을 구워 파는 지금의 부르튼 손이 몇 년 전 샤넬 쇼핑백을 들고 섰던 손보다 예쁘다.


뿜어져 나오는 어두운 빛을 숨기기 위해 내 삶에 더 이상 갓을 씌우지 않아도 된다. 허영을 비웠더니 그 자리에 삶의 의미가 채워지고 있다. 묘지라는 이름의 전차로 갈아타기 전, 훌쩍 뛰어내렸다. 이제 테네시 윌리엄스가 표현한 극락(엘리시움)이라는 정거장이 지옥과 영혼의 죽음을 의미하는 극명한 반어였음을 몸소 깨달았다. 비건 4년 차 내가 딛고 선 여기 이곳이 진정한 엘리시움 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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