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상흔

by 김희영


명절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주말의 편안함과는 다른 특별함.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고, 도란도란 옛 얘기들을 펼쳐 놓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오랜만에 해묵은 앨범을 들고 나오셨다. 부모님 젊을 적, 나와 동생들 어릴 적 사진이 담긴 묵직한 앨범. 하나를 펼치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졌다. 사진마다 말로써 주석이 붙었다. 이때는 이랬고, 저 때는 저랬지. 설명이 길어지고, 그러는 새 웃음도 풍부해졌다. 메마른 하루에 정겨움이 촉촉이 내린 하루였다.

앨범을 들고 방으로 들어서자, 문득 친구들의 편지를 차곡차곡 모아뒀던 상자가 생각했다. 책꽂이 위에 케케묵은 상자를 들어냈다. 물티슈로 상자 겉면을 훑어내자, 상자를 열고 빼곡히 쌓여있는 편지들을 보자, 새삼 세월이 흐른 것을 느꼈다. 얇은 줄로 묶인 편지 꾸러미를 풀었다. 꼬부랑글씨로 써 내려간 초등학교 친구들의 편지와 누군가에게 받았을 법한 종이학, 중학교 때 사용했던 도서대출증과 파란 명찰, 고등학교 때 친구와 시장에 가겠다고 적었던 구겨진 외출증과 쪽지까지. 사실 다 버릴 법도 한데, 소소한 것 모두 상자에 들어 있었다. 잉크가 바랜 영화표, 작은 핸드폰 고리 인형도 있었다. 분명 그때는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었을 테다.

편지 꾸러미를 헤쳐놓다가, 낡고 두툼한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故 문병란 선생님께서 보내신 답장이었다. 아, 맞다. 그때야 언젠가 꿈에 비뚠 마음을 안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작가는 배고픈 직업이다."

어릴 적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아빠는 염려 반 반대 반의 모습을 보이셨다. 내 의지가 확고했음에도 아빠는 '저 어린것이, 어린 마음에 겉멋만 들어 허튼 생각을 한 것이다'고 여기셨던 것 같다. 그래도 하고 싶다,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자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난해도 괜찮아, 멋진 작가가 될 거야!'

꿈을 가진 몇 년 동안, 등단하겠단 열망과 누군가의 삶에 변화를 주는 영향력 있는 작가가 될거란 확신만을 안고 바지런히 뛰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나의 글을 끊임없이 고치면서, 나의 다짐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작가의 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인세로 떨어지는 돈이 얼마냐느니, 그래서 몇 권의 책을 팔아야 한다느니,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면 배곯으며 살아야 한다느니. 오롯이 작품에 몰두하기엔 어려운 현실 세계의 말들. 나는 조금씩 좌절해가기 시작했다. 문학이란 무엇일까, 어떤 글을 써야 할까, 잘 팔리는 글을 써야 할까, 예술적인 글을 써야 할까. 앤디 워홀의 말처럼 똥을 싸도 박수를 쳐줄 만큼 유명해져야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작가의 등용문에 대한 의구심도 켜졌다. 신춘문예와 같은 치열한 과정을 통해 등단해야 소설가로서 인정받는 절차가 과연 합당한 것인가를 묻고 있었다. 아직 작가라는 꿈에 닿지도 않았는데, 조금씩 걸음을 뗄수록 실망하고 있었다.

실망이 커질수록, 처음의 순수한 마음처럼 '하고 싶다!' 했던 포부는 점점 '하기 싫다'로 바뀌기 시작했다. 몇 년을 바지런히 달려온 꿈의 질주에 브레이크를 밟은 것이다. 생각에 제동이 걸린 순간, 나는 꺼진 다짐에 다시 시동을 걸고 싶지 않았다. 마치 먹기 싫은 밥숟갈을 억지로 떠먹는 것처럼 꾸역꾸역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마음 한편은 이미, 꿈을 이루지 못하리란 두려움과 풀리지 않은 몇몇 의심들로 다짐이 잠식 당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꿈을 이루고 즐겁게 사는 사람들이 대단하고 멋지다 말하는 것은, 그들은 현실에 깨어 있으면서도 꿈을 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꿈과 현실은 애증의 관계다. 나는 작가로 살면 가난하게 살지도 모른다는, 그로 인해 돈만 밝히는 작가로 전락해버릴까 두려운 마음에, 작가란 직업 자체를 포기해야 할까 생각했었다. 그렇게 스스로 끊임없이 고민하면서도 꿈을 놓지 못했다.




고등학교 3학년, 문학에 대한 삐딱한 반항심이 든 건 그 무렵이었다. 내 또래가 '최연소'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지역 신춘문예에 당당히 등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알지도 못하는 그 애가 참 대단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아이의 난해한 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반면에 '왜 나는?' 이란 건방진 의구심의 고개를 숙이지 못하던 때였다. 왜, 나는, 이렇게 열심히 글을 쓰고 있음에도, '최연소'라는 달짝지근한 명사를 달 수 없는 걸까.

그즈음 문병란 선생님께서 학교로 특별강연을 오셨다. 강연이 끝나고, 선생님 연구실로 편지를 보냈다. 난해한 시에 대하여, 등단에 대하여, 요즘 문학에 대하여, 그리고 나의 글에 대하여.

그때 문병란 선생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몇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답장을 차분한 마음으로 다시 읽어본다.

격한 마음에, 어리고 어리숙하고 모난 마음에 써 내려갔던 열아홉 나의 편지. 칼로 봉투를 뜯어 조심스럽게 읽어 내려갔던 선생님의 답장. 그때를 어렴풋이 떠올리며 가라앉은 마음으로 읽어 내려간다. 선생님은 격동의 열아홉을 달래듯, 단정한 문장으로 빼곡히, 그리고 정성스럽게 편지를 쓰셨다.


불연이면 그 '충격'이 호기심이 되어 희영 양도
그런 천재의 흉내를 내고 싶을지도 알아요.
희영 양도 젊은이인데
왜 그런 새로운 유행에 끌리지 마라는 법 있겠어요.
(...)
전위적 새로움, 반전통 저항적 그룹, 탈국적 거리의 불량아들
뒤틀린 그들의 구역질 나는 구토증 속에는 낡은 기성세대,
부패하고 사악한 기성세대의 타락을 거부하는 반항도 있지요.
한 시대의 유행도 필연성이 있고
그러한 기성세대가 되는 거죠.
(...)
시란, 문학이란 랭보 같은 악동이나
사강 같은 악녀만 하는 게 아니라
톨스토이 할아버지 같은 분들이 있어
그 역사 깊고 심오하다고 생각해요.
자, 그럼 희영양 힘내요.
오늘은 투쟁, 내일은 승리 화이팅!
故 문병란 선생님의 답장 중에서


편지는 그 외에도 두 통이 더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대학교에 입학할 무렵,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총 세 편의 답장.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전했고 그 해, 고등학교를 마무리 하며 썼던 단편소설 하나를 평가받았었다.


(...)
객관적인 사실주의 수법, 농촌과 아버지,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주인공의 고뇌를
잘 그려 놓았다고 생각해.
솜씨나 수준을 거론할 만하며
story 만드는 재주와 심리적 묘사도
수준급이란 생각이 드는군.
<희망가>에 나오는 마늘의 비유에서
어떤 모티브를 얻었다는
마늘밭 나름대로 문제의식도 소화하고 있어.
미래의 신춘문예 당선을 미리 당겨서 축하해주고 싶군.
故 문병란 선생님의 답장 중에서


선생님의 답장을 읽고 난 후, 나는 불현듯 그 당시 썼던 나의 단편을 읽고 싶어졌다. 오래전 묵혀둔 웹메일에서 글을 찾았다. 그리고 나는 왠지 울고 싶어졌다. 새벽 두 시. 눈가에 그렁그렁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노트북을 닫았다.

단편을 잘 썼기 때문에, 고등학교의 내가 대견했기 때문에 울컥했던 것이 아니다. 작품은 사실 완벽하지 않았다. 어딘가 미숙한 얼룩이 묻어 있었다.

울고 싶었던 이유는, 그 시절 '문학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면서 머릿속으로 치열하게 자신과 싸워나갔던 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큰따옴표를 쓸까 지울까, 반점 하나를 찍을까 말까, 문단 하나를 들일까 말까 고민한 그때의 눈빛이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문학이 삶의 전부였다. 대학교 진학이 무의미하다고 여길 만큼, 문학에 빠져 살던 시간이었다. 등단해서, 빈틈없이 빼곡히 나의 가치관을 문학으로 채워나가고 싶었다. 그땐 그랬다. 끊임없이 창작해야지만 옳은 것이라고, 어지러운 세상에 의문을 제기해야지만 진정한 문학인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소녀였다.

나는 그때가 그립다. 어느 하나에 몰두하며 타오를 수 있었던 그 시간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꾸준히 글을 쓰는 일이다. 제대로 문학이라는 것에 몰두할 수 있을 때까지 잠시 몸을 움츠리고 있어야 할 때라고 다독일뿐이다. 그래야만 여고생의 내가 어른의 나에게 실망하지 않을 것 같아서.

언제까지나 자극을 주는 존재로, 열아홉의 내가 내 마음의 방 안에 남아있으면 좋겠다. 다시 일어날 힘을, 꾸준히, 끊임없이, 던져주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나는 타올라, 앞으로도 내 가슴 한편에 열정의 흔적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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