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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편지

by 김희영

※ 매거진 [notitle]에 한 달에 한 번 연재되는 편지 시리즈입니다.

@Pixabay


to.


나는 빈틈을 싫어한다.


어느 순간부터, 빈틈과 빈 공간과 빈시간들을 싫어했다. 그래서 강박증 환자처럼 빽빽하게 채워 넣기 시작했다. 빈틈도 빈 공간도 빈시간도. 어릴 적엔 공부도 시간표에 딱딱 맞춰서 했다. 미술학원에 갈 시간에 다다르면 10분 전에 맞춰 학원에 갔고, 미술학원이 끝나면 수학학원, 수학학원이 끝나면 컴퓨터학원, 컴퓨터 학원이 끝나면 새벽에 별을 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각에 맞춰 걸었고, 정해진 시간에 버스를 탔고, 대문을 45도 열어젖히고 들어갔다. 엄마는 장하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그렇게 대학을 갈 나이가 됐다. 명문대는 이미 따놓은 당상이었다. 짐을 꾸렸다. 자취를 시작했다.


나는 하루를 헛되게 쓰지 않았다.


촘촘하게 나눠 쉬는 시간의 여유도 없이 알차게 써 나갔다. 운동으로 아침을 열어서, 책 읽기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점점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밤에 잠을 자는 시간조차 내겐 빈시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잠이 줄어들고, 이부자리에 누우면 잠 따위도 오지 않았다. 영화를 다운로드하여 보거나, 이미 읽은 책을 뒤져다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변함없이 운동으로 아침을 열었다. 피곤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마음속의 응어리가 부서지는듯한 희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불면증 약을 먹지 않았다.


여전히 빽빽한 시간들을 보냈다.


이제 좀 쉬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 따위 비웃어 넘겼다. 니들이 나에 대해 뭘 아냐고 되레 윽박을 질렀다. 1분이라는 시간도 촘촘하게 나뉘어 1분도, 1초도, 0.5의 작은 단위의 순간들도 내겐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퍼즐 같은 것을 빡빡하게 맞추고 있거나, 색연필로 무언가를 촘촘하게 칠하고 있을 때 누군가 어깨를 톡 건들면 불같이 역정을 냈다. 벽에 밀어붙이고, 소리를 지르고, 물건들을 집어던졌다. 사람들이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 마저도 연락이 끊겼다. 그러나 그것들은 별로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만나지 않음으로써, 나는 나만의 정해진 시간을 온전히 지켜내며 쓸 수 있었다.


정신과에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본 것은 엄마였다.


충격이었다. 엄마가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하다니. 장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었던 사람은 바로 엄마였다. 시간을 잘 배분해서 쓰는 것에 박수를 쳤던 사람도 엄마였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잘못됐다고? 나는 미치지 않았다고 엄마에게 조곤조곤 설명했다. 말이 빨라지고, 꼬이고, 느려졌다가, 슬퍼지기도 했고, 갑자기 화가 났다. 믿을 수 없었다. 엄만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거지! 책상 옆에 있던 화분을 들어 유리창을 깨부쉈다. 쌓아 올린 책을 넘어뜨리고, 컴퓨터를 박살 냈다. 엄마는 머리를 쥐고 비명을 질렀다. 당장 정신병원에 처넣겠다고 했다.


나는 빈틈을 싫어한다.


어느 순간부터, 빈틈과 빈 공간과 빈시간들을 싫어했다. 그것이 어느 순간일까. 난 언제부터 빈틈을 싫어하게 됐을까. 간호사가 열고 나간 좁은 문틈, 공허하기 짝이 없는 새하얀 방, 덩그러니 놓여 있는 침대와 나, 째깍거리는 소리로 내 뇌를 긁어대는 시계 초침. 견딜 수가 없다. 저 문을 쳐 닫고 싶고, 하얀 벽지를 다 가려버릴 만큼 책을 빽빽이 쌓고 싶고, 시계를 뜯어다 불태워버리고 싶다.


공허하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는 순간, 엄마가 나를 미친놈 취급하기 시작한 순간 이미 내 인간관계에서부터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빈틈, 내 삶에 빈틈이 생겨난 것은 그때부터였고, 그 이후로부터 지금은 완전한 빈틈의 세계에 접어들었다.


내가 시간을 잘 배분해서 쓴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이었나. 잘못된 일이었나. 그럼 난 언제부터 잘못된 시간들을 보냈을까. 잘못된 시간을 보냈다? 아니, 나는 나름의 의미 있는 시간들을 보냈다. 나는 누구보다 알찬 시간들을 보냈다. 무엇이 내가 잘못됐다고 평가하는가, 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치지 않았다. 미치지 않았다.


나는 빈틈을 싫어한다.


아니, 빈틈을 싫어했다.


그럼 지금은?


차라리 내가 저 공허한 빈틈이 돼버린다면 이런 복잡한 생각도 접어버릴 수 있을까. 내가 시간이 된다면, 내가 이 방 안의 공기가 된다면, 벽지가 된다면, 문틈이 된다면, 무책임하게 쏟아지는 불안과 초조함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지 않을까.


차라리 빈틈이 되고 싶다.


벽에 박힌 대못과 긴 수건을 본다.


그래 차라리, 빈틈 따위가 된다면 편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빈틈이 되기로 결심했다.


빈 공간이 될 것이고, 저 문틈이 될 것이고, 시간이 될 것이다. 날더러 미쳤다고 손가락질한 너희들, 그리고 엄마. 나는 그 모두를 저주한다. 나는 떠날 것이다.


나는 빈틈이 될 것이다.


누구든지 보라. 난 미치지 않았음을, 내가 시간이 되고 벽이 되고 문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것이다.


그래 나는, 빈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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