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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Dec 09. 2021

지난 감정의 초상

 흐릿해진 지난날의 기억에는 거뭇한 그림자만 남아 있었다. 애잔한 공기만 남은 장소에 얼굴도 기억 안나는 이의 옷에서 나는 풋내가, 자꾸만 과거로 떠나고 싶게 만들었던 걸까. 어느 날 날 애타게 좋아했다던 사람과 마주한 날, 내 마음에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난 그 사람을 단 한 번이라도 가슴 저리게 사랑했던 순간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늘 내 곁에 있었던 것 같았다. 내가 어디에 있었든, 무엇을 하고 있었든, 그의 기억 속에는 강한 충격처럼 자리 잡아 있던 듯, 어린 날의 내 모습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 남은 내 모습은 어설프고, 엉성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 과거에도 우리는 여전히 수줍게 웃었다. 그때 즐거웠지, 좋았지. 몇십 년의 세월을 쌓은 오랜 친구처럼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어쩌면 우리의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의 진심에 무심했던 지난날을 애써 얼버무렸다.

 친구라는 이름 아래,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여름날 바다 위의 튜브처럼 둥둥 떠다녔다. 그 어정쩡한 부유가 그의 마음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 어설프고, 서투른 우정 사이에는 이게 사랑이었는지,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는지 착각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 친구라는 그 말이 우리의 사이를 끈끈하게 만들었다가도, 절대 연인으로 이을 수 없는 벽을 치기도 했다.

 그저 다 좋은 과거였다고 웃을 수 있었던 건, 속절없이 흘러간 세월 덕분이었다. 시간은 늘어진 테이프처럼 지루하게 흘러왔다. 비단 그 시절에서 멀어졌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반복되는 사계는, 달콤한 과자를 주며 설렘을 선물하던 기념일마저 아무것도 아닌 날로 만들어버렸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이 그저 인사치레가 되어버린 세상에 산다는 건, 오히려 설익은 과거에 매몰되게 만들었다. 상처뿐인 청춘도 아름다움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그 순간으로. 분명 우정이었는데, 사랑이었던 게 아닐까 착각하게 만들어 버리는 시간으로.

 그래서 어쩌면, 별이 익어가는 밤에 마음은 더욱 심란해졌던 것일까. 조금 더 대화를 이어나간다고 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내 시절의 잔상을 가지고 있는 이를 더 붙잡아두고 싶어 했다. 그냥, 술이나 한 잔 더 한다거나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그리운 과거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때 좋았던 날, 누군가 아파할 때 뜨거운 위로를 해줄 수 있던 때,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던 때. 삶의 모든 순간들이 가을에서 겨울로 천천히 시들해져 갈 때, 뜨거웠던 여름날 바다로 뛰어들 수 있는 그런 순간이지 않을까.

 가지 말까?

 흔들리는 마음을 붙들어준 것은, 오히려 그 한 마디였다.

 아니, 그냥 가.

 이제 우리는 감정에 휩쓸려 쉽게 상처를 주고받을 나이는 아니었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는 걸, 강산이 한 번 뒤엉킬 동안 깨달아 왔다. 힘겹게 아쉬운 마음을 삼키고 감추는 것은, 아름답게 기억되는 과거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냥 가. 그 말에 담긴 마음은, 명확한 감정을 알 수 없었던 지난 과거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우리의 아름다웠던 시절을, 우정을, 풋풋했던 감정을 훼손시키지 말자고. 그렇게 가슴에 또 한 번의 안녕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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