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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Dec 11. 2021

어느 겨울, 기차역에서

 눈발이 흩날리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기차역에서 쿵쾅거리는 마음을 애써 추슬렀다. 분명 오기로 했는데, 오기로 했는데…. 차마 잇지 못한 문장은 입가에 한동안 걸려있었다. 몇 번이나 기차를 그대로 보냈는지 모른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던, 애가 타는 사랑에 결말은 결국 이렇게 으스러지고 말 것인가.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널 사랑하는 것이 정답이었다고 증명해내고 싶었던. 그날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추운 칼바람을 한없이 내쉬고 있었다.

 귓가를 간지럽히던 너의 목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는데, 그 말은 나에게 맞지 않았다. 마치 일 년 사이 키가 한 뼘 더 자란 아이가 입은 바지처럼, 복숭아뼈를 훌쩍 올라선 짧은 바지를 입은 것처럼, 나에게 너에 대한 사랑은 그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층 성숙한 것이었다. 하루가 마다하고 널 보러 기차에 몸을 싣지 않아도, 며칠 씩 영상통화를 하지 않아도 좋았다. 밤에 잠들기 전, 자장가를 불러주던 네 목소리에 심취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는 이 사랑을 지켜낼 수 있었다. 스무고개의 문턱을 넘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로서는,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 줄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단순히 너와 결혼을 꿈꾸는 것이 좋은, 그저 가벼운 진심은 아니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첫눈이 오는 모습을 바라보지 않아도 좋았다. 밖에 첫눈 온다, 보고 있어? 응, 보고 있어. 뜨거워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네 목소리가 가슴이 아플 정도로 좋았을 뿐이었다.

 그런 어느 날 갑자기 너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을 때, 나는 점진적으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화가 났다. 떨어져 있다고 나를 우습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나에게 너무 소홀해진 건 아닌지. 화는 점점 서운함으로, 서운함은 점점 걱정으로, 우울함으로, 초조함으로,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하루가 눈처럼 쌓여 한 달이 되었다.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얼음이 되어버린 눈을 바라보면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그 얼음 덩어리를 바라보면서, 나는 몇 번이고 두려움을 삼켰다. 무슨 일이 있는 거겠지, 내게 연락하는 걸 잊을 사람은 아니니까, 괜찮을 거야, 괜찮아 난….

 - 나 지금 올라갈 건데. 역으로 와줄 수 있어?

 일방적으로 네게 문자를 보냈다. 너와 정확하게 약속을 맺은 건 아니었는데, 나는 네가 그 문자를 반드시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와줄 수 있어?'는 '오기로 했다'로 바뀌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져 죽을 것만 같았다. 가슴 아프게 뛰는 심장을 붙잡고 기차에 올라섰다. 창밖에 어지럽게 흩어지는 함박눈을 보았다. 너와 함께 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는 아름답게 느껴지던 것들이, 지금은 사납고 무섭게 보였다. 그 눈보라는 거대한 해일이 되어 내 몸과 영혼을 집어삼켰다. 내 주변이 온통 추운 겨울이었다. 창밖도, 몸도, 마음도.


 수많은 사람이 오가던 기차역이 점점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더는 기차 시간을 미룰 수 없었다. 막차에 가까워져 올 때쯤, 나는 내 영혼을 극적인 상상 속으로 처참하게 밀어 넣었다. 네가 달려오는 모습,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는 모습, 우리의 두 눈이 마주치는 모습, 네가 달려와 넓은 어깨로 나를 안아주는 모습, 온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껴안으며 속삭이는 모습, 미안하다는 너의 말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내 모습, 막차를 떠나보내는 모습…. 수많은 모습이 조각조각 쪼개져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마치 밖에 흩날리는 어지러운 눈보라처럼.

 너는 결국 역에 오지 않았고, 나는 마지막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타고서야 비로소 나는, 눈물을 쏟아냈다. 몇 사람 타지 않은 한적한 기차 안에서 코를 훌쩍이며 숨죽여 울었다. 나만 바보같이 널 사랑했던 걸까. 널 사랑하는 게, 결국 틀렸던 걸까. 역시 몸이 멀어지면 모든 것들이 아득해지고 마는 것이었나. 코트가 눈물로 축축이 젖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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