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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Dec 11. 2021

친구에게

 우리가 사랑했던 한 시절은, 여름날 시들어가는 봄꽃처럼 처연했어. 화려하게 타들어가는 폭죽을 보면서 먹먹해진 눈을 끔뻑거리듯 말이야. 사람도, 사랑도, 인생도 서툴었던 우리는 우리의 손끝에서 부서져가는 청춘의 불꽃을 그저 흘려보냈어. 그땐 잘 몰랐던 시간들은 돌이켜보니 참으로 소중하고 의미 있는 순간들이었지. 우리는 그저 놓치고 있었던 거야. 그땐 중요한 줄 몰랐으니까.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고, 잠시 딴생각을 하기도 했고, 갑자기 울적해지기도 했고, 어느 때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잠기고 싶어 했지.

 작은 고통에도 아파할 수밖에 없었던 건, 인생에서 그만큼의 아픔을 겪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어. 그저 순탄하게만 살아온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겠어. 우린, 그냥 모든 게 처음이었어. 그래서 우리가 조금 더 끈끈해질 수 있었나 봐. 그 시절 우리는 누구보다 각자의 삶에 귀 기울여 주었어.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위로나 공감 따위가 아니었어. 힘들다는 하소연에, 너도 힘들었어? 하며 되묻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됐지. 우리는 그렇게나 인생을 몰랐고, 삶을 몰랐다. 모르는 것 투성이었으니, 감정에 대해서도 관대해질 수 없었어. 갑자기 화가 나기도 했고, 갑자기 울기도 했고, 어느 날은 갑자기 초연해지기도 했지. 마음에는 하루가 마다하고 폭풍우가 몰아쳤고, 감정의 거친 바다 위에서 겨우 숨을 헐떡이며 표류하고 있었어. 그때 그 심경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어. 아니, 서로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만 어루만져줄 수 있었지. 나 너무 힘들어. 그래? 나도 정말 힘든데. 그저 그 한마디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었던, 우리들 말이야.

 인생에 수많은 폭풍우가 지나가고 마침내 잔잔한 바다가 된 것은, 날씨가 화창했기 때문은 아니었어. 다년간의 경험이 거친 폭풍우를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주었던 거야. 그런 모습을 '어른이 되었다'고 말하더라. 우리는 우리가 언제 어른이 되었는 줄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있었어. 눈을 떠보니 서른이 되어 있었고, 마음은 잔뜩 위축되어 있었고, 사람을 의심하는 눈이 생겨 있었어. 우리는 인생의 동반자처럼, 끊임없이 서로의 안부를 물었어. 너는 어느덧 내가 힘들 때마다 기대고 싶은 사람이 되었어.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알아채고 안아주는 각자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어.

 가끔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어. 그때 그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흘려보내기만 했던 시간들에 대해서 말이야. 그 시절 속에 우리는 상처 입기도 했지만, 순수한 행복을 느끼기도 했지. 모든 게 다 좋았어. 너와 함께한 시간들, 그 속에 잔잔한 설렘과 웃음과 따뜻한 공기들. 그걸 다시 느끼고 싶어서, 우리는 계속 그때의 이야기들을 나누나 봐. 타임머신이 없다면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너와 함께라면 언제든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었으니까.

 널 처음 만났던 순간을 기억해. 어색함 속에 맴돌던 그 풋풋한 설렘을. 내 이십 대 인생의 필름 속에 네가 함께 웃고 있어서 행복해. 네 친구가 될 수 있어서 행복해. 그리고 지금도, 널 계속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해. 모든 게 행복한 밤에, 이 짧은 편지를 쓴다.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고, 오래도록 우리, 친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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