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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Dec 14. 2021

고통스러운 낭만으로 기어이 밀어 넣는구나

 살다 보면,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추억들이 떠오르곤 한다. 난장판인 결말에 정면으로 몰아붙인다고 해도, 가끔은 그 순간을 마주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왠지 다시 돌아가면, 결말을 번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운명에 맞서 무딘 칼자루를 쥐는 무식한 용사처럼, 과거에 쉽게 굴복할 수 없는 시간들. 그만큼 내 몸과 마음을 무너뜨려서라도 반드시 지켜내고 싶은 사랑이 있었다.

 차갑게 느껴지는 밤공기에 누군가의 따뜻한 훈김이 목덜미에서 부서졌을 때,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부딪혔다. 직진할까, 후퇴할까, 가만히 멈춰 설까. 그때만큼은 진취적으로 나설 수도 없었다. 나의 어리석고 그릇된 판단으로, 이 작고 소중한 관계가 쉽게 부서져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주 연약한 생명체를 두 손에 그러쥔 듯 안절부절못했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는 지도 몰랐다. 주변 사람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고 했지만, 나는 늘 당신 앞에서 나사 하나 빠진 로봇처럼 부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땐, 부자연스러움을 차치하고서라도 무조건 직진해야만 했다. 지금 당신을 놓쳐버리면, 당신을 붙잡지 않으면, 당신을 껴안지 않으면, 당신은 자유로운 나비처럼 또 다른 꽃을 향해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가지 마, 여기 있어. 내게 그 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당돌하고, 뜨거운 시간이었다.

  몇 번의 뜨거운 밤이 흐르고, 몇 번의 차가운 해가 떴다. 모든 게 어설펐고, 부족했던 날들이었다. 어렸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던 실수는, 당시에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성격은 늘 나에게는 빡빡하게 굴면서, 남에게는 관대했다. 특히나 잃고 싶지 않은 관계에서는 더욱 그랬다. 당신의 모든 실수를 용서했다. 그래도 괜찮아. 이래도 좋아. 그래, 네가 다 옳아. 때론 당신의 판단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무조건 다 좋다고 머리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당신을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으니까.

 결전의 순간은 단 하루 만에 들이닥쳤다. 억하심정에 내지른 화가 모든 관계를 망가뜨리고 말았다. 내 말 좀 들어주면 안 돼? 그날 선 목소리가 당신에게 큰 해를 입혀 버렸다.

 "난 그런 네가 숨 막힌단 말이야. 어딘가 기죽어서 슬슬 눈치만 보는 그런 거. 그런 거 말이야."

 당신은 자유로운 나비였고, 나는 제자리에 붙박여 있는 꽃이었다. 아무리 달콤한 향기를 뿜어낸 , 당신의 마음을 온전히 붙잡을 수도 없었다. 혹여나 어느  갑자기 홀연히 당신이 떠나가버릴까 두려운 마음에,  성에도 차지 않는, 이해도 되지 않는 심정으로 당신을 붙들었다. 괜찮아, 좋아,  좋아.  엉터리 같은   마디로 당신을 붙잡을  있다고 생각한  어리석었다.

 당신이 떠나고 난 뒤, 나의 계절은 차갑게 얼어붙는 겨울이 되었다. 그러나 이따금, 당신에게서 연락이 올 때면 나의 계절은 이듬해 새싹을 틔우는 이른 봄이 되었다. 잘 지내지? 그저 가벼운 안부만으로도 나는 고통스러운 낭만 속에 헤엄쳤다. 응, 나 잘 지내. 그 인사를 끝으로 나의 계절은 또다시 냉혹한 겨울로 돌아갔다. 그런 날들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당신이 내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이라도, 남 주기 아까운 못된 심보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내 시간은, 당신에게 소리치던 마지막 밤에 멈춰 있었다. 내 말 좀 들어주면 안 돼? 결과를 다시 번복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럼 나는, 다시금 너에게 다정하고 상냥한 호응을 할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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