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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Dec 23. 2021

믿음만으로 널 사랑하기로 했다

 때론 마음만으로는 해결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그냥, 내가 마음먹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일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마음의 문을 걸어 닫고 살았다. 내가 네 마음을 모르듯이, 네가 내 마음을 모르듯이, 우리가 서로에게 무심했듯이.

 사랑이라는 감정은 거짓말 같았다. 아니, 어쩌면 소설 속에나 등장하는 이미 닳고 달아진 옛것의 감정 따위였다. 적어도 우리에겐 그랬다. 손끝에 스치는 설렘 따위 냄비 속의 알코올처럼 금세 날아가버렸다. 네 목에 코를 박고 킁킁거려도, 그 예전의 사랑스러운 향기는 나지 않았다. 너한테서만 나던 좋은 향기가 있었는데. 내가 그 향기를 잊어버렸던지, 네가 네 향기를 잃어버렸던지, 누가 원인인지도 몰랐다. 나는 이 사랑에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그저 애꿎은 네 탓만 했다.

 너의 모든 것들이 싫증 났다. 종이를 구겨놓은 것 같은 너의 까치집 머리도 싫었고, 겨드랑이에서 풍기는 땀냄새와 반쯤 파먹은 손톱도 싫었다. 눈 밑에 난 점도 싫었고, 엊그제 배꼽 옆에 물린 모기 자국도 싫었다. 생긋거리던 네 표정은 갈수록 시들어져 갔다. 타 죽을 것 같은 뜨거운 여름에서 차가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 다다른 것 같았다.

 이제 우리는 여기까지 해야만 했다. 구질구질한 사랑,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달라지려나 했다. 나의 이런 마음에도 너는 변동이 없었다. 되려 왜 자길 버리느냐며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너의 손을 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나는, 아니 우리는, 천천히 서로 잡은 손을 풀고 있었다. 손 끝에 너의 온도가 느껴지지 않기 시작한 것은, 이제 더는 네 얼굴을 봐도 떨리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그건 너도 똑같은 마음이었을 테다.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설레지 않게 되었다는 걸.

 그러나 이런 질기고 질긴 사랑에도 너는 끝까지 이 사랑을 지키려 했다. 우리는 분명 다를 것이라고, 이런 뻔해 빠진 사랑이라도 끝은 행복할 거라고. 그 끝이 뭔데? 내 물음에 너는 명확하게 답을 내리지도 못했다. 우리는 이별을 택하지 않는다면, 이 사랑의 종착지가 어디로 향하고 있을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곳에 가자고 먼저 말하지 않았다. 나는, 아니 우리는.

 이별을 고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맥주 한 캔을 샀다. 앉은자리에서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분명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이제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었다.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는 걸. 맥주 몇 캔을 들이켜고, 몇 날의 밤이 지나고, 몇 번의 눈물과 후회에 잠기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다시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결혼할래? 결국 내가 먼저 이 긴 사랑의 종착지를 먼저 내뱉었다.

 그렇게 우리는 또 홀린 듯이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나 또 서로의 사라진 향기를 찾아다니며, 왜 이렇게 변해버렸느냐며 각자의 탓을 하겠지만. 우리는 끝내 다시 만났다. 이제 나는 더욱더 사랑을 모르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이게 사랑이었던 건지, 사랑하는 중인지, 사랑 인척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만, 넌 날 배신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이 믿음만으로 널 사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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