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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Dec 26. 2021

모든 순간, 네가 있었다

 마음까지 추운 계절이다. 창밖은 차갑게 부서지는 겨울인데, 내 마음은 뜨겁게 녹아 누군가에게 엉겨 붙고 싶어 했다. 단순히 푹 잠을 자고, 맛있는 밥을 먹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였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설 때 밀어닥치는 그 어두운 적막과 소음 하나 없는 고요 속에 정신은 오히려 아득해졌다. 코트를 벗어 헹거에 걸어두고, 습관처럼 침대에 드러누웠다. 사람의 다정한 말소리, 누군가의 잔소리가 이토록 그리웠던 적이 있던가. 가운데가 움푹 꺼진 베개를 끌어안으며 얼굴을 비볐다. 차가운 손끝은 금세 따뜻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윗집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화장실 환풍구를 통해 스며들어왔다. 이 집이 소름 끼치도록 고요해서, 그런 소음이라도 있어야 사람처럼 사는 기분이 들었다.

 뜨거운 보이차에 찬물을 조금 섞어 마시며 창밖을 보았다.  누군가의 울음소리처럼 불어대는 바람은, 베란다 창틀에 쌓인 눈을 치고 지나갔다. 씻지도 않은 채로 거실 벽에 기대앉았다. 늘 이맘때면 네가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네며 "수건은 동그랗게 마는 게 아니라 네모지게 접어야 한다"라고 잔소리를 할 시간이었다. 그땐 그런 잔소리가 듣기 싫었는데, 지금은 그런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함박눈이 온 하늘을 뒤덮어 달이 보이지 않았다. 하얗게 기우는 손톱 달을 보면서, 왜 눈이 오지 않느냐며 툴툴거리던 네 입술이 떠올랐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했는데, 눈이 오지 않는다고. 눈이 오는 날 사진을 예쁘게 찍는 법도 찾아놨는데, 쓸모없게 되었다고. 그때라도 네 모습을 사진으로 조금 찍어 둘 걸. 우리는 오랜 세월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해오면서, 그 숱한 사진 한 장 찍지 않았다. 특히나 겨울에 찍은 사진이 없었다. 추우니까 집 밖에 나가지 말자는 게 서로의 이유였다.

 그게 어쩌면 화근이었던 걸까. 네가 차츰 식어가게 된 게. 몇 겹의 계절을 보내며 너는 점점 너 자신을 미워하고, 증오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일도, 삶도 재미가 없어졌다고 했다. 처음엔 자책을 하다가, 그렇게 점점 무기력해져 갔다. 겨울이면 내게 따뜻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네던 네가, 이제는 가시 돋친 비난을 자신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몸에는 네가 자해한 상처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따뜻하게 품어주려 해도,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런 어느 날, 거실에서 식칼을 들고 나를 바라보던 네 모습을 마주했던 때, 나는 덥석 너를 껴안았다. 애써 무너지는 가슴을 누르며 네게 말했다. 요즘 정신과 진료를 받는 게 이상한 세상은 아니라고, 누구나 마음이 아프면 병원에 갈 수 있는 거라고. 그날 떨리는 손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넌, 분명 나에게 다음 주에 병원에 가기로 약속했었다. 절대 나쁜 생각하지 않기로, 다시는 자신을 해하는 끔찍한 상상 따위 하지 않겠다고. 그러나 너는 끝내 약속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화장실 샤워부스에 난자하게 튄 피와 핏기 하나 없이 노란 얼굴로 문쪽을 바라보던 네 시선이, 그동안 공들여 쌓아 왔던 우리의 세상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너는 그렇게 겨울바람에 흩어지는 함박눈처럼 내 곁을 떠났다.

 첫겨울의 너는 이듬해 봄처럼 생긋했는데, 마지막 겨울의 너는 잿빛으로 하얗게 타고 말았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네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았는데, 세상은 어떻게든 살아졌다. 시간은 한 생명의 증발 따위에도 무심하게 흘러갔다. 그렇게 조금씩 무뎌졌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올 겨울의 첫눈을 보고 나서야 나는, 천천히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무척이나 고대했던 넌데. 우리가 함께 맞는 크리스마스에는 한 번도 눈이 오지 않다가, 네가 없는 크리스마스가 되어서야 비로소 눈이 왔다. 마치, 그동안 내리지 않은 눈에 대한 보상을 한꺼번에 쏟아내기라도 하듯이. 그때야 나는 너의 부재를 실감했다. 움푹 들어간 베개와 네모지게 접는 수건과 소름 끼치게 적막한 이 집에서. 네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창밖을 보라고 말할 수 없는, 그 창밖을 바라보는 네 얼굴을 볼 수 없는, 그 뜨거운 마음을. 나는 턱밑에 뜨거워지는 감정을 삼켰다. 이제 네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걸 삼키고, 삼키고, 삼켰다. 비집고 나오는 눈물은 턱밑으로 속절없이 흐르는데도, 나는 계속 삭히고, 삭히고 또 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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