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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Feb 04. 2022

당신을 기억하고 잃어버리기까지

 ─ 모든 게 다 좋아질 거야.

 당신의 말에 애써 고개를 주억거렸던 건, 정말 그 말대로 다 좋아질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때로 고통은 시간이 해결해주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애꿎게 당신을 탓하지 않겠노라고, 수많은 밤을 다짐 속에 담갔다. 눈물과 고통에 축축해진 영혼을 이끌고, 현실이라는 어둠을 걸었다. 긴 어둠의 터널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으려, 이따금 오므린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했다.

 손바닥 위에 이상이 있었는데, 나는 언제나 그 꿈을 펼치고 싶지 않았다. 세상이 무척 어두워서, 그 작은 빛 따위가 전혀 길을 밝혀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로지 어둠에 익숙해지는 것만이 능동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발가벗겨진 채, 부끄러움 없이 어둠 속을 걷다 보니 이제는 진정 사람의 마음속도 모르게 되었다. 저 사람이 나를 어찌 생각하는지, 진정 날 위하는 것인지, 어쩌면 각자의 이기심으로 상대를 대하는 것은 아닌지. 고꾸라진 영혼의 등줄기에는 이따금 고통이 뻗쳐 올랐다. 고슴도치의 털처럼 뾰쪽 날이 서서, 누구도 내 곁에 오지 않길 바랐다. 모든 게 다 좋아질 거란 당신의 말은 어쩌면, 날 위하는 말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어둠 속에서 나지막이 내뱉은 진심이 기나긴 밤동안 나를 옥죄어 왔다.

 손안에 작은 빛을 보고 싶었던 건, 문득 떠오른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실 길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은, 나의 내면을 보는 것인데, 그간 난 이 빛을 회피해왔던 건 아닐까. 삶의 모든 답이 이 안에 있는데, 단지 열어 보이는 것만으로도 상처받지 않을까 두려웠던 건 아닐까. 칠흑 같은 세상 속에 이 작은 빛 따위가 전혀 힘을 못쓸 거라고, 애써 부정하고 치부해 왔던 건 아닐까. 오므린 손가락을 살며시 벌렸다. 손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무수한 빛줄기. 언젠가 지평선 너머로 고꾸라지듯 추락하던 혜성을 바라보듯, 먹먹하고 참담한 마음으로 손가락 틈을 바라보았다. 애써 펼쳐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 움츠러든 용기를, 위축된 희망을, 애써 잊어오던 꿈을, 외면하고 싶던 사랑을, 나는 아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빛을 직면하고 살았던 적이 있었다. 빛에 눈이 멀어 세상의 어둠 따위 보이지 않던 때. 그때의 나는 행복했을까. 영롱한 빛이 무척이나 따뜻하고 상냥해서, 어쩌면 뜨거워서, 나는 세상의 차가움을 깨닫지 못했다. 그 빛만을 바라보며 현실을 외면한 채, 내 몸이 부서져라 사랑했다. 그러나 그 안에도 흉기는 있었다. 붉은 피를 뿜어대며 고통에 요동치는 내 마음을 읽고 나서야,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손을 쥐었다. 다시는 빛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한 지 수년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몸살을 앓는 중에도, 나는 끊임없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골몰했다. 이상은 배고픔을 해결해주지 못했고, 현실은 황폐한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 사이에서 적정선을 유지해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잘 살고 싶었다. 말년에 죽음을 눈앞에 둔 노인처럼, 마치 마지막 목숨을 내뱉기 직전 누군가에게 "너 참 잘 살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처럼. 그것만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처절하게 몸부림치면서도, 때론 우울감에 참담해지면서도, 그래도 꿋꿋이 내가 살고 싶은 삶에 대해 방향을 잡아야만 했다.

 이토록 자기 자신과 치고받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렇다면 난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비틀거리며, 방향을 모른 채로 고통에 몸을 웅크려도, 누구나 다 이렇게 살아간다면. 모든 게 다 좋아질 거라던 당신은, 이 모든 고통과 아픔을 겪어본 적이 있어서 위로를 건넸던 것일까. 아니면, 당신도 아프고 있던 중이었을까. 무수히 흘러간 지난밤의 어둠 사이에, 당신은 늘 다른 형태로 내게 다가왔다. 바람이었다가, 눈이었다가, 슬픔이었다가, 행복이기도 했다. 같지만 다른 느낌으로, 모든 게 다 좋아질 거라고 말하던 당신. 그런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가, 이따금 잃어버렸다가, 다시 또 어느새 내 곁에 서서 같은 말을 하는 당신. 그런 당신을 또 잊어버리는 계절의 한가운데서, 또 나지막이 당신의 이름을 불러본다. 때로 어머니였다가, 아버지였다가, 연인이기도 했던 당신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저 그런 생각만으로도 허전한 마음이 따뜻하게 부풀어 오르곤 했다. 겨울이란 혹한기의 현실 속에 맨몸으로 웅크려있어도, 당신의 따뜻하고 상냥한 목소리 하나면 다 괜찮아지던. 가끔 손안에 빛줄기를 바라보다 덮어도, 그런 따뜻한 당신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내가 가끔 힘들 때, 당신을 잃어갈 때, 그럴 때 한 번씩 튀어나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으면 좋겠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나는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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