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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an 28. 2022

몸살

 1.

 밤새 몸살을 앓았어요. 선잠에 들었다가 이른 새벽에 눈을 떴어요. 눈가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마음에는 조금 더 농도 짙은 끈적한 물이 흘러내려요. 마치 꽁꽁 얼어붙었다 녹기 시작한 차가운 물체처럼 말이에요. 마음 표면이 물기로 축축해요. 당신이 없는 새벽 내내, 나는 울었어요.


 2.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 같은 날들이었어요. 그 겨울에 오롯이 홀로 서 있는 시간이란, 고독의 낭떠러지에 내버려진 기분이었어요. 꽁꽁 얼어붙어서는, 누군가 손가락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벼랑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죠. 그런 아슬아슬한 시간이 흘렀어요. 감정도, 눈물도, 기쁨도 얼어붙어버린 시간들. 사람들은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어요. 안 본 사이에 너무 많이 말라버렸다고요. 나도 내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변명 같은 거짓말도 하지 못했어요. 그러게요, 왜 이럴까요. 그런 날은 또 애써 하루 종일 웃었어요.


 3.

 나에게 몸살을 앓는 새벽은, 하루 내 얼려 있던 마음을 녹였어요. 눈보라가 이는 계절에 눈의 결정은 마음에 내려앉아 서서히 녹아내렸죠. 마치 마음이 눈의 결정을 빨아들인 것처럼, 물기 어려 촉촉한 마음이 뜨겁게 요동치기 시작했어요. 아마도 당신이 무척 보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차갑게 얼려놓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다시 뜨거워지려는 걸 보니 말이에요.

 몸을 동그랗게 말고 무릎을 껴안았어요. 종아리부터 등줄기까지 서늘한 고통이 밀려들었어요.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기분 나빴다가, 흠씬 두들겨 맞고 난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리기도 했어요. 품 안에서 밀려 나오는 뜨거운 훈기가 정신을 더 아둔하게 만들었어요. 당신은 나를 한 번도 그리워하지 않았을 거라고, 나도 당신을 그리워하지 않는다고, 이제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수없이 되뇌며 얼려왔던 마음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흐르고, 넘쳐서 눈물이 되었어요. 이젠 나도 어쩌지 못하겠는 거예요. 애써 막아왔던 것들이 버티지 못하고 터지기 시작했으니까요.


 4.

 아마도 당신이 왔다 갔는지도 모르겠어요. 눈앞에 보이지 않는 당신의 손길이 어딘가, 제 마음을 주물러주고 갔나 봐요. 언젠가 상냥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던, 뜨거운 가슴으로 안아주던,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내쉬던 숨소리까지. 두꺼운 책의 낱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처럼, 당신은 새벽 내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있었죠. 아프지 않느냐고, 무척이나 보고 싶다고, 두 눈을 마주치고서는 뜨겁게 입을 맞추었죠. 어쩌면 당신도 나처럼 나를 그리워했을 거라고, 수많은 하루를 죽여가며 고통 속에 그리움을 묻어왔을 거라고, 우리는 알 수 없는 각자의 공간에서 애타게 서로를 찾고 있던 거라고. 애써 부정해왔던 수많은 감정과 기억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녔어요. 사실 나는,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고, 당신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오만한 착각을 믿고 싶었던 거라고요.


 5.

 눈앞에 존재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 뜨거운 눈빛과 마음과 얼굴을 마주했다면, 이런 몸살도 금세 지나쳤겠죠. 어느 행성과 부딪혀 산산조각이 난 별빛들이 윤슬처럼 하늘 위를 수놓은 밤, 그 반짝이는 빛에 당신의 눈물을 떠올려요. 우리, 이 좋은 마음, 오랫동안 간직해요. 언젠가 희미해지고 말 진심 어린 고백을 받아들이는 척하며, 그래, 그래요, 우리, 했던 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유약한 진심이 변질될 거라는 걸 알았기에, 나는 더욱더 처절하게 지난날의 당신을 부인해왔는지도 몰라요. 오랫동안 간직될 수 없을 거라고, 이미 당신은 나를 잊었을 거라고, 그러니 나도…. 그 서글픈 고통 속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게 무척이나 아파서, 나는 또다시 내 온 마음을 겨울에 밀어 넣겠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사랑을 모르는 사람처럼. 그래, 그래요, 우리, 했던 어느 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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