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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Feb 09. 2022

널 잊지 못할까 봐, 이대로 침몰해 죽게 될까 봐

 널 만나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벌어진 틈새로 보이는 우리의 얼굴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서서히 그렇게 벌어져 무너지기 시작한 관계에서도, 끝을 향해 치닫는 와중에도, 우리는 우리를 행복하다고 여겼다. 괴로워 눈물짓고, 밤새 끓는 속을 쥐어뜯어도 왜 우린 그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어두운 새벽, 그 어느 때보다 시린 몸과 마음을 제 스스로 달래면서 우린 왜, 대체 왜.

 네 향기는 마치 부서진 유리조각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반짝였다. 그 얕은 향기가 이따금 코끝을 꽤 오래, 진득하게 붙어 다녔다. 너 없이 잘 살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따금 네 향기가 기억의 회로를 타고 밀려들 때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곤 했다. 아니, 너 없이는 절대 살 수 없을 것 같아. 그 긴 밤 괴로움에 휘몰아치는 두려움이, 그리고 잊히지 않는 지난 기억들이 가슴에 꽉 메여 있었다. 단지 널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했던 한 때가 시간이 흘러도 집요하게 좇아 다닐까 봐 무서웠다. 영영 널 잊지 못할까 봐, 이대로 침몰해 죽게 될까 봐.

 몸을 감싸는 선명한 향기와 향기를 따라가는 기억의 조각들이 긴 밤동안 억눌려 있었다. 억겁의 밤이 쌓이면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싶었다. 널 포기하고 싶다가도, 널 사랑하고 싶다가도, 그 용기가 없어 다시 또 널 버리는 상상을 했다. 십 수 번의 버림 속에서도 너는 끝까지 모르겠다는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벌어진 틈새로, 양손을 벌려 내게 손짓하면서, 이리 와 내 옆으로, 친절한 네 목소리가 귓가를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나는 언제든 널 버리고, 널 짓이기고, 널 상처 입히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총성이 들리면 피니시 라인을 향해 맹렬히 돌진할 텐데. 넌 그런 미래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차가움보다 뜨거움이 더 간절하다는 듯, 상처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듯 그렇게 어리숙한 눈빛을 지우지 않았다.

 나는 더 깊은 몸살을 앓았다. 온몸에 기운이 빠지고, 아련한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몸이 제 무게를 가누지 못해 고꾸라지고, 백 미터 달리기를 끝낸 사람처럼 숨을 헐떡였다. 울음을 참으려 두 손으로 입을 들어 막아도, 눈새로 눈물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난 단지 누구도 상처받지 않길 바랐는데. 내가 상처를 다 떠안고 버티고 싶었던 건데. 그 버팀이, 지옥 같은 억겁의 밤을 쌓고, 또 쌓았다. 이제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어둡고 우울한 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주변을 가렸다. 나는 매일 어두운 밤 속에 살았다. 나만 상처받으면 된다는 그 안일하고, 위선적인 태도로 고통스러운 하룻밤을 십수 년처럼 흘려보냈다. 이젠 지쳤다. 널 사랑하는 일도, 널 포기하는 일도, 그 사이에 선택을 하지 못해 우물쭈물하는 나의 애매한 태도도.

 신중해지고 싶었다는 말은 어쩌면 상처 입고 싶지 않은 나의 방어기제였을 테다. 우리의 사랑에 끝이 온다면, 나는 더는 누군갈 사랑하고 싶지 않다. 누굴 열렬히 사랑하는 것도, 가슴 찢어지는 이별을 하는 것도, 어둠에 둘러 싸여 복잡하게 골몰하는 것도. 차라리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감정을 까먹게 돼도 좋다. 칠흑 같은 밤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서는, 영원한 사랑의 종식을 선언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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