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영 Feb 11. 2022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면 돼

 어둠이 내린 새벽, 고즈넉한 산세에 쓸려가는 나뭇가지들의 비명. 간약한 소나무 줄기에 다닥다닥 붙은 솔잎 덩어리들이, 서로의 가시에 몸을 스치며 우는 .  속에 파묻혀 있으면 슬픔도 무뎌질까 해서 막연한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달빛에 스산한  빛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비탈진 산길에서 겨울밤은 그저 어둡기만 한데, 소복이 쌓인 눈은  힘으로 발악하듯 고고한  빛을 뿜어 냈다. 두터운 양말  시린 발끝을 움직이며,  차분한 참담함을    삼켰다.

 눈발에 흩날리는 감정은, 어느 골동품 가게에서 발견한 스노볼처럼 요란스러우면서도 고요했다. 죽는 일은 평생에 단 한 번일 줄 알았는데, 턱밑까지 쫓아온 두려움은 매일 밤 내 영혼의 숨통을 죄여 왔다. 밤이면 어김없이 살인 현장의 피처럼 눈물이 난자하게 튀었다. 어느 살인범의 밤처럼 깊은 허무함과 비릿한 상상력이 온몸을 자극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억눌린 욕심은 밤이면 어김없이 칼을 쥐고 일어났다. 날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가, 또 한 없이 죽였다가, 또 한없이 슬퍼했다. 막막한 삶에서 눈물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일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웅크리는 일뿐이었다.

 삶에 질문을 던질 때, 방향을 전혀 찾을 수 없을 때, 나는 내 마음의 눈이 멀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나의 혜안은 깊다고 착각했던 어린 날의 순수한 자신감은 죽었다. 죽음 앞에 고개 숙여 눈물을 떨궈낸 들, 그때의 뜨거운 열정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집착에 가까운 광기로 눈물을 노래하다,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게으름에 변명을 붙일 기력도 없었다.

 그때 나타난 당신은, 이미 죽은 내 영혼을 말없이 껴안아 주었다. 어떤 말도, 어떤 위로도 건네지 않고서. 그저 당신의 은근한 온기와 목덜미에서 맡아지는 향기와 머리를 포근히 감싸는 다정한 손길만이 공허한 공간을 가득 메웠다. 그동안 잘 살아왔다고, 고생했다고, 이제는 좀 쉬라고. 당신의 품이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 무언의 포옹이, 다 죽어간 영혼 곁에 새로운 영혼을 불어넣었다. 이미 죽어버린 지난날의 영혼과 상처와 감정들은 어떻게 해도 되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감각만이,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다시 새로운 삶에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이전에는 느낄 수 없던 힘을 갖게 되었다.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진 가치관으로, 어쩌면 속박에서 벗어나 조금 더 가뿐해지고 자유로워진 영혼으로, 나는 나름대로 흡족한 다른 생을 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세상의 녹이 묻은 깡통을 벗어버리고, 매끈해진 몸으로 차가운 겨울을 유영했다. 흩날리는 함박눈에 몸을 씻고 차가운 겨울바람에 몸을 말리면서도, 나는 거기서 극한의 추위조차 느끼지 못했다. 답답함은 조금 이른 조급함이 되었고 나는 하루빨리 새로운 생을 살아가고만 싶었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라고, 앞서 가지 말라고 그리고 더는 아프지 말라고. 당신은 또 말없이, 어른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처럼 세상에 맞서다 주눅이 들까 봐, 또 한 번 잔인하게 자신을 죽이게 될까 봐, 당신은 나의 그런 명랑함을 염려했다. 나는 오만하게도, 그런 당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네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한 번 더 말해주면 돼, 와 같은.

 모든 사랑이 유한하다고 하지만, 당신과는 어쩌면 끝이 없는 사랑을 이어나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별 없는 사랑이 있을까. 이 세상에 이별 없는 사랑이 있다면, 내게 그 사랑은 당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차가운 눈의 결정들이 뜨거운 살갗에서 천천히 녹는 밤. 그 새벽 결에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서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널 잊지 못할까 봐, 이대로 침몰해 죽게 될까 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