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영 Feb 19. 2022

다정한 거짓말

 내 입술에서 봄 향기가 났던 것은, 특유의 말씨 때문이었다. 당신은 내가 말을 참 예쁘게 한다고 했다. 그게 지금까지 날 놓지 않은 이유라고 했다. 하지만 당신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이 다정한 거짓말에도 뼈가 있다는 걸.

  언젠가 닥쳐올 이별을 예견한 듯, 당연하게 당신을 밀어냈다. 이제 더는 아픈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았다. 무수한 벚꽃잎이 사방을 별빛처럼 수놓던 밤, 시원한 봄 밤의 공기를 폐 가득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하며 마음을 다 잡았다. 당신은 순진한 눈으로, 그저 내가 좋다는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쩔 줄 몰라하는, 금방이라도 내 어깨를 낚아 채 껴안을 것만 같은, 당신의 사랑은 초조하면서도 조급하고 행복해 보였다. 나는 침착하게 숨을 고루 내쉬며 그런 당신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 헤어지자.

 당신은 어떻게 사랑이 한순간에 변할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내 어떠한 이유도 당신에겐 변명처럼 들릴 테니까. 그리고 당신은 말도 안 되는 변명과 나름의 논리적인 답변을 늘어놓으면서, 어쩌면 당신 탓을 할 수도 내 탓을 할 수도 있는 누군가의 '탓'을 굴리면서, 애써 우리의 이별을 부정하려 들 테다. 그 부정이 싫어 여태껏 거짓말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그 무미건조한 고백들을.

 그러다 결국 당신은 당신만의 사랑 논리를 펼칠 테고, 지난날의 내 사랑들을 부정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 그건 말이야, 그 말은 말이야, 그때 그 행동은 말이야 "다 널 사랑했기 때문이야." 당신만의 사랑으로 지난날 내 기분과 감정과 상처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저 당신의 사랑이 정당했다는 것으로 일축시키려 들 테다. 이제는 그런 말들에 반론을 뱉는 것도 지겨웠다. 당신은 이미, 당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애처로운 발버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내 마음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당신은 살기 위해 아등바등거렸지만, 내 육신은 이미 죽어 어느 강물에 떠내려 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새롭게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죽은 육신을 바라보며 어디까지 떠내려가는지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죽어가는지, 얼마나 바닥까지 내려가는지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내 시체가 끝없는 시간의 해일에 떠밀려가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당신은 끊임없이 당신의 사랑을 지켰다. 이제 우리에게는 '우리'라고 불릴 사랑이 없었다. 그곳엔 오직 각자의 시간과 추억과 애증만이 뼛조각처럼 남아있을 뿐이었다.

 ─ 이제 그만 날 놔줘.

 내가 당신의 마음에 수많은 쐐기를 박을 동안, 당신은 천천히 침몰했다. 제발, 이러지 마. 점점 무너지는 미간과 떨리는 입술과 내 손목을 꼭 잡은 두 손이, 물에 빠진 사람처럼 처절했다. 그동안 우리의 지난 사랑이라는, 추억이라는, 시간이라는 물살에 내 몸이 휩쓸려가는 동안 침묵으로 방관했던 당신이 떠올랐다. 나는 한참 물끄러미 그런 당신을 내려다보았다. 죽을 것 같이 헐떡이는 당신을, 제발 한 번만 봐달라며 울며 애원하는 당신을, 그 떨리는 손끝을, 이제 나는 완전히 외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조금도 따뜻하지 않은 목소리로 당신에게 진심을 말했다.

 ─ 잘 지내.

 다정한 거짓말이 끝났다. 식어가는 중이던 우리의 사랑도, 당신도 그리고 당신이 좋아 죽던 그 옛날의 나도.

매거진의 이전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면 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