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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Feb 22. 2022

당신이 침묵하는 시간동안

 하루가 깊어질수록 내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내가 기억하는 나의 모습은 어떤 걸까.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던 걸까, 아니면 나 자신을 애타게 사랑했던 걸까. 모든 걸 다 그러쥘 수 없어 가슴 아파하는 밤이 짙어져 갔다. 당신을 더 사랑해주지 못해 가슴 아파하면서도, 당신을 사랑하면서 내가 사라지는 게 싫었다. 언제부터 우리의 사랑은 병들기 시작했던 걸까? 아니, 어쩌다 나는 애써 덮어두고 있던 나의 내면을 들추게 되었던 걸까.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었던 걸까, 지키고 싶었던 걸까, 그저 나를 사랑하고 싶었던 걸까. 당신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내 몸을 끌어안아주면서도, 차마 착잡한 한숨을 삼키지 못했다. 당신도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당신을 바라보며 했던 모든 말들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이런 이기적인 나라도 사랑해줄 수 있느냐고, 매일 밤 당신의 가슴을 붙들며 울부짖었다. 그런 한 편으로는 날 사랑해주길 바랐다가도, 또 한 편으론 날 미워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사랑한다고도, 미워한다고도. 그 굳게 다문 입술이 무서워 나는 선뜻 묻지 못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내가 당신의 생각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는 건, 어쩌면 이제 당신은 내게 불편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인 걸까. 내 표정을 읽은 당신이 천천히 입을 뗀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 말이, 마치 나에게 우리 관계의 책임을 다 떠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날 위한, 내 마음의 배려라는 얄팍한 갑옷을 두른 말. 그러나 그 말은 전혀 배려가 아니고, 단순히 눈에 보이는 뻔한 결말을 회피하고 싶은 말. 내가 우리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나의 타오르는 영혼을 붙들며 애써볼 때, 당신은 그저 그런 나를 지켜만 봐야 했다. 어떻게든 붙여보려는, 어떻게든 헤어지지 않으려는 내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허탈감이 당신을 점점 더 지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어떻게 해야 하는 줄 모르겠다고 한다. 나도 이런 사랑이 처음이라 결말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제 나는 당신이 아니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이런 가슴 아픈 사랑, 지긋지긋하다고. 이별을 먼저 생각하는 불편한 사랑이 수면 위로 머리를 올리자, 나는 있는 힘껏 그 머리를 눌렀다. 물에 빠져 죽으라는 듯이. 다시는 사랑 따위의 감정, 살아 숨 쉬지 말라는 듯이.

 예전에는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내 영혼이 죽지 않을 만큼 버텨왔다. 밑바닥으로, 저 깊은 심해로 잠수하는 영혼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그 방조가 어쩌면, 사랑 따위 질렸다는 듯 물속으로 머리를 처박아 넣는 나의 다른 모습일지도 몰랐다. 난, 그저 그땐, 그만큼 당신을 사랑했을 뿐이었다. 내가 죽어 없어져도 됐고, 내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되었다. 단지, 당신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내 인생이 찬란하게 빛이 나는 것만 같았으니까.

 그러나 언젠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점점 당신의 그늘에 가려져 죽어가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향해 부지런히 나아갔다. 당신이 하고 싶은 꿈도 생겼고, 욕심도 생겼고, 그 사이 '우리'가 함께 일궈나갈 것들에 대해 부푼 마음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던 건, 그 삶을 내가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당신의 꿈에, 당신의 욕심에, 당신이 말하는 '우리'에 내가 없어져 있었다. 당신이 말하는 '나'의 모습이란, 이미 깊은 심해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이제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름답지도, 당차지도, 멋지지도 않았다. 난 그저, 당신의 삶에, 당신의 그늘에 가리워진 사람일 뿐이었다.

 '나'도 사랑하고, '당신'도 사랑하겠다는 다짐은, 점점 더 내게 욕심이라고 일렀다. 욕심, 두 가지를 다 그러쥐는 일.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 혹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일. 이제는 내가 사라지는 걸 두고 보고 싶지 않은 걸, 내가 죽어가는 것, 내가 얇게 짓눌리는 걸 바라만 보고 싶지 않은 걸. 당신은 옛날의 내 모습을 그리워하면서도, 동경하면서도, 사랑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미워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당신이 떠넘긴 그 잔인한 배려에, 나는 또 한 번 두 가지 사랑을 놓고 무게를 잰다. 글쎄, 난 말이야…. 내가 이러다 정말 당신을 포기하게 되어 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내가 우리를 놓게 되면 어떡하려고. 당신은 모든 책임과 결말을 나에게 미루기만 한채, 마치 방조자처럼, 마치 제 3자인 것처럼 날 바라만 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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