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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Feb 26. 2022

우리를 잃어버리기 이전에

 넘실거리는 바다 위로 금빛 윤슬이 일렁일 때, 우리는 그 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도 먼저 말을 내뱉지 않았다. 마치 말하지 않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입술의 벙긋거림이 금기시된 일인 양 우리는 침묵한 채 붉게 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에메랄드 빛을 내며 차츰 식어가는 해를 바라보는 것은, 마치 우리의 사랑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의 세상이 조금씩 식어가는 와중에도 우리는 두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그저 그 손길만이 우리 세상을 지켜낼 수 있는 사명인 듯이.

 한때 우리가 서로 사랑했던 시간은 하늘을 붉게 물들일 만큼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사랑에 대해 잘 모르던 날들, 운명이라는 단어를 쉽게 내지를 만큼 우리는 처음부터 뜨거웠다. 온몸과 마음을 모래밭에 뒤섞고 엉키고 나서야, 우리의 살갗이 붉게 달아오른 것을 보았다.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화끈거릴 정도로 익혀버린 것이었다. 잠시 바닷물에 몸을 식히면서, 따끔거리는 피부 껍질을 불리면서,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사랑에 무던해져 갔다. 붉어진 얼굴에 흰 이를 드러내면서 세상 좋은 웃음을 띄었다. 그 세상에서의 우리는 참으로 어여뻤다.

 시간이 흘러, 그날의 우리를 추억할수록 감정이 더 짙어졌다. 서로에게 바라는 욕심은 진득해졌다. 그러나 사랑에 그을린 살갗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무던해졌다는, 익숙해졌다는 말이 되레 각자에게 상처를 입혔다. 예전에는 분명 뽀얗고 하얗던 당신의 마음이, 어느 순간 더 알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예전의 그 마음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지금 본성을 드러내는 것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알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잘잘못을 따졌다. 원래 넌 이렇지 않았잖아, 그러길래 왜 해변에 와서, 왜 햇볕을 쬐여서, 왜 바다에 들어가서, 애초에 왜 우리가 사랑을 해서. 우리는 그렇게 지난날의 아름다웠던 우리의 모습을 차츰 잃어가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한참 상처를 입힌 후에야, 노을이 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바다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전에 없던 처참함과 상처, 그리고 차가운 눈물로 젖어 있었다. 상처를 준 일에 대해 후회한 들, 이제 더는 돌이킬 수 없었다. 상처는 더 큰 상처를 낳았고, 지난 사랑은 오해로 물들어 갔다. 진심은 착각이 되었고, 착각은 결국 더 깊은 우울의 동굴 속으로 영혼을 밀어 넣었다.

 예전의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제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을 추억하지 않아야 했다. 넌 너대로, 난 나대로, 우리가 이렇게 새까맣게 변해버린 채로 이별을 고해야만 했다. 꼭 맞잡은 두 손의 온기가 모래밭에 파묻혀 있었음에도. 그러나 땅에 옮겨 붙은 온기는 해가지면 금세 식을 것이었다.

 우리, 아쉬워하지 말자, 우리 그래도 행복했잖아.

 결국 말을 하지 않겠다는 금기를 깨고 누군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즈음, 우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킬 테다. 말없이 일어나 무릎과 엉덩이를 털고, 조금 눈물 맺힌 눈을 마주하고서는 등을 질 테다. 그리고 각자의 시간에서, 또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을 추억하며 눈물을 쏟아낼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을 기억하지 않기로 한다. 그 세상에서의 우리는 무척 행복했으니까. 세상이 무너져도, 파도가 온몸을 뒤엎어도, 햇살이 따가워도 행복했을 그 세상에서 우리. 흰 이를 드러내며 불행도 다 껴안을 수 있던 그 뜨거운 사랑을 그저 덮어두자고. 그렇게 우리의 사랑했던 시간을 지켜내자고. 깰 수밖에 없는 약속을 다시금 되뇌며, 해가 저문 짙은 새벽을 턱밑까지 끌어올리며 또 밤새 울고 말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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