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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Mar 17. 2022

기댐의 정도

 하루 종일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오늘은 미세먼지 농도가 짙다고 했다. 날씨가 흐린 탓이 단순히 먼지 때문인 줄 알았는데, 늦저녁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먼지를 끌어안고 내린 비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이슬처럼 내려와 손바닥에 앉았다. 가방에 챙겨 넣은 우산을 주섬주섬 꺼내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꽤 오랫동안 우중충할 것 같다.


 당신의 마음을 파악하는 일은 마치 늦저녁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기분이었다. 속을 알 수 없었다. 그저 나의 오만한 판단으로, 당신의 마음엔 먹구름 같은 슬픔이 잔뜩 끼어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언제 걷힐지도 모른 체, 나는 당신의 얼굴을 바라만 보아야 했다. 언젠가 울면서 하소연하는 당신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 저번에도 말했듯이, 그렇게 우울하면 차라리 정신과 상담을 받지 그래? 맨날 울기만 하잖아. 

 그러자 당신은 정말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쳤다. 그 그친 울음에서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원망도, 슬픔도, 아픔도. 당신은 어떻게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처럼, 아니 아예 평생 나에게 기대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그게 당신이 내게 보인 마지막 원망이었다.

 그 이후로 당신은 나에게 단 한 번도 우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지친다고도, 싫다고도, 힘들다고도 하지 않았다. 수시로 나에게 "내가 우울해해서 지쳐?"라고 묻던 당신이, 이젠 내게 더 이상 그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힘들어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지난밤 혼자 운 듯 얼굴이 퉁퉁 부어있는데도 당신은 울지 않은 척했다. 그럼 난 또 그 마음이 서운해서 당신을 붙들고 윽박을 질렀다.

 ─ 힘들면서 왜 힘들다고 안 해? 난 당신의 그런 점이 마음에 안 들어. 좀 기대라니까?

 내 말에 당신은 입술을 벙긋거리다 이내 다물고 말았다. 난 그때야 깨달았다. 언젠가 턱밑에 맺힌 눈물을 무표정으로 닦아내며 입술을 굳게 다물어버렸던 당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미 당신은 그때 모든 걸 단념했던 것이다. 

 당신이 슬퍼할 때 내가 버팀목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처럼 여겨졌다. 당신의 슬픔과 우울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 줄 알았으니까. 그게 10년이 되고 20년이 돼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버텨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런 감정은 금세 식고 말았다. 먼지 낀 비가 불길을 잡아내버리듯, 당신의 빗줄기 같은 우울도 나의 일렁이는 의지를 쉽게 꺼뜨렸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 나한테 기대지 않으면 누구한테 기대게? 혼자 또 끙끙 앓으려고 하지?

 나는 또 속상한 듯 당신에게 내뱉었다. 푸념, 어쩌면 원망 섞인 목소리로. 그러나 당신은 끝까지 입술을 벌리지 않았다. 마치 허공에 대고 울부짖는 짐승처럼, 난 바보같이 같은 말만 내뱉었다. 당신도, 그 누구도 호응해주지 않는 아주 외로운 혼잣말을.

 ─ 넌 너 스스로 노력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잖아. 왜 내 말은 듣지도 않아? 그러니까 상담받아보라고 했지?

 그러자 당신은 무너질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아낼 것 같은 표정이 되어서는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 … 내가 지금 해결책을 달란 게 아니잖아.

 이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 나도 노력하고 있어. 이럴 땐 그냥 말없이 안아줄 순 없는 거야?

 순간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다른 형태의 기댐을 생각하고 있던 건 아닐까.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가벼운 무게, 그냥 몇 번 토닥이고 말면 될 정도의 우울 같은 것을 생각했던 게 아닐까. 당신의 우울을 온전히 다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건, 그저 나의 오만함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당신의 우울을 나 홀로 다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부서지고 있던 건, 당신이 아니라 나였다. 나도 당신처럼 방향을 몰랐다. 당신이 당신의 우울한 마음을 열고 들여다보고 있을 동안, 정작 나는 내 마음속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정작 나야말로 다른 사람한텐 기대지 않으면서, 당신에게 기댐을 강요했다. 나도 날 잘 모르면서, 나에게 쌓인 짜증을 당신에게 쏟아냈다.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까 전보다 빗줄기가 조금 더 굵어졌다. 나는 젖은 한 손을 그러쥐고는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모난 소리가 쌓여 시꺼먼 먹구름이 되었다. 그 먹구름이 비가 되어 서로의 마음을 젖게 만들었다. 서로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면서, 편협해진 마음 따위 내려다보지도 않은 채, 각자의 탓만 했다. 그 탓들이 오해가 되고, 돌이킬 수 없이 많은 상처만 남겼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있었을까. 사랑했었다면 그땐 언제일까. 지금은 사랑하고 있을까. 우리의 사랑은 어디쯤에 있을까. 끝을 향해 떠밀려가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목표를 좇아 표류하고 있을까. 서로가 남긴 상처가 쏟아지는 빗물처럼 온몸과 마음을 다 적시고 난 후에야 얼굴을 마주 보았다. 차가운 마음을 비비며 살기 위해 애쓰는 당신을 안아주기에는, 우리가 너무도 멀리 와버렸다. 이제는 당신을 안아줄 수 없었다. 우선 당신보다는 나부터 먼저 살아야 했기에, 이제는 각자의 마음을 지키는 게 더 소중해져 버렸다. 

 이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점점, 당신이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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