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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May 02. 2022

梅花

 그날의 꽃을 기억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푸른 하늘에, 하얀 솜꽃이 피어오르던 나뭇가지를. 창 밖을 새파랗게 물들던, 동이 틀 새벽녘에 두 눈을 마주 보고 누워 웃음을 터뜨렸지. 뭐가 그리도 즐겁고 행복했던지, 평생 돌아갈 수 없을 십 대 시절처럼 미소 지었어. 조금 설레기도 했고, 또 한 편으론 가슴 아프게 뭉클하기도 했던. 시름시름 앓다 사라져 버릴 몸살처럼, 우리의 행복은 꼭 그런 것이었어.

 모든 건 오래가지 못했어. 이제 막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한 꽃송이는, 아주 짧은 시간 시들 거리다 땅바닥으로 고꾸라졌지. 지천을 수놓은 그 조그마한 하얀 몸짓들은, 누군가의 구둣발에 얇게 짓눌려 찍소리도 내지 못했어. 아프다고, 힘들다고, 그만 괴롭히라고 말하지도 못했지. 그렇게 천천히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선, 언제 떨어졌냐는 듯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서서히 잊혀갔지.

 새 봄날이 밝아오던 날, 어쩌면 우리의 사랑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있었는지도 몰라. 세상에게 짓눌려있던 몸을 서로 일으켜주면서, 우리의 인생에도 봄이 찾아왔음을 깨닫고는 기뻐했지. 겨울이 죽어 없어지는 걸 서글픈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봄이 일찍 온 것을 슬퍼하다가, 그러다가 어느새 봄을 반기고 있었어. 우리의 사랑도 봄처럼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거꾸로 가기 시작했어. 넌 사랑하길 원했지만, 난 반대로 사랑하고 싶지 않았어. 그게 누구였든, 난 너무 지쳐있었다는 말이야. 설렘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지난 새벽이 무색할 정도로, 그 뜨거웠던 마음이 어느 순간 서서히 식어갔어. 내가 차마 버리지 못한 겨울의 온기와 그 바람에 앓기 시작한 몸살과 이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내 곁을 언제나 맴돌았어. 너와 함께 봄을 꿈꾸는 순간에도, 네가 사랑을 상상하던 시간에도, 매화 꽃잎이 하나 둘 지기 시작하던 때에도 말이야. 

 결국 내가 먼저 너에게 이별을 고했고, 넌 내가 아프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그 이별을 받아들였어. 아니, 어쩌면 기약 없는 기다림을, 너는 시작했는지도 모르지. 언젠가 내가 겨울을 버리고 오는 날, 몸살을 앓지 않고 건강해지는 날,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기를 내는 날을 말이야. 그런데 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금도 겨울에 멈춰있어. 다시는 너에게 손을 뻗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널 사랑하는 일은 행복했지만, 반대로 두렵기도 했거든. 봄이 지나고, 여름이 무르익고 나면 또다시 추운 겨울이 올 테니까. 나는 또다시 아픈 겨울을 겪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계절의 변화가 무척 두려웠어. 애석하게도 너에 대한 마음도 차츰 아련해지고 식어가기 시작했어. 이제 난 널 완전히 잊어가고 있어. 널 지워가고 있어.

 매일 밤 네 생각이 혜성처럼 떨어지는 순간에, 나는 애써 머리를 저으며 널 밀쳐냈어. 이제 내가 너에게 손을 뻗어 연락하는 것은, 오히려 너에게 상처만 주는 일이 될 테니까. 지금 당장 네가 보고 싶은 마음은 아주 잠깐일 테니까. 그리고 난 또 나 혼자 살겠다고 널 버려두고 갈 테니까. 이제 그런 건 싫어. 그래도 널 사랑했던 순간만큼은 진심이었으니까. 너와 봄을 꿈꿨던 날들만큼은 따뜻했으니까. 그 옛 시간들을 온전히 간직하고 싶어. 왔다 갔다 네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그 시간들을 안 좋은 기억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이제 나는 널 다시 찾지 않아. 이제 널 그리워하지도, 보고 싶어 하지도 않아. 그저 넌 내가 정말 뜨겁게 사랑했던 어느 순간에, 동이 틀 새벽에 순수하게 미소 짓던 얼굴로 남아 기억될 뿐이야.

 네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이제 부디 날 잊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날 원망하며 잊으라고 말했지만, 사실 난 네가 날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도 나처럼, 순수하고 뜨겁게 사랑했던 우리의 모습을, 아주 행복한 꿈처럼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나 이제 행복해. 아니, 너 없이도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그러는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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