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영 May 01. 2022

이 모든 걸, 내가 다 망쳐버린 것만 같아서

 토막  감정에서 피가 흘렀다. 울컥거리며 흘러내리는  검붉은 액체는 차갑게 식어 눈물이 되었다. 단지 아프다는 말로는  표현할  없는, 애매한 감정이었다. 살을 있는 대로 파먹고, 앙상하게 가시 뼈만 남은 곳에는 아주 시린 바람이 소리를 내며 통과했다. 뼈마디가 시리고, 가슴은  비어서, 오히려 마음이라는 녀석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채우기에만 급급했다. 아무 생각 없이 욱여넣는 밥숟갈,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은 결국 변깃물에 왕창 쏟아졌다. 눈물과 콧물, 가슴에서 흘러내린 비릿한 핏물은 그렇게 게서 빠져나갔다. 하루가 다르게  몸과 마음이 메말라갔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다. 차라리 빈 깡통이 되는 편이 나았을 테다. 생각하는 동물로 태어나, 끊임없이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으면서도, 그게 안 좋은 줄 알면서도, 도통 그 습관을 내려놓지 못했다. 내가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는 죄책감과 타인을 상처 입히고 말았다는 괴로운 마음이 공허한 마음에 그득 들어찼다. 어떤 하루는, 오히려 그런 슬프고 답답한 감정들로 가득 차서는, 외로움마저 들지 않았다. 소름 끼치는 적막만이 흐르는 새벽에, 소리라곤 오직 나의 울음뿐이었다. 괜찮다고, 다 좋아질 거라고 다독이면서 야윈 어깨를 스스로 쓸어내렸다. 이제 더는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아주 참담한 마음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비로소 완성되었다. 빛줄기 하나 보이지 않는, 그 침침한 어둠 한가운데 몸을 뉘었다. 어둠은 오히려 차갑다 못해 날 포근하게 안아 주었다. 이제는 적막에서 헤어 나올 의지조차 남지 않았다. 때론 이대로 외롭고 쓸쓸하게 홀로 남겨져 있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다시는 가슴 아픈 이별을 감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을 테다.

 사랑에 대해, 그것은 아주 뜨거운 감정이었노라고 열변을 토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당신에게, 그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한다며,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고백을 내뱉었던 적이 있었다. 당신은 아주 익숙하게 그 고백을 받아들이고는, 천천히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아니, 당신의 육신은 늘 내 곁에 있었는데, 당신의 영혼은 늘 다른 곳에 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것을 더욱더 사랑했다. 그 공허함, 곁에 있어도 곁에 있는 것 같지 않은 외로움, 함께 있어도 느껴지는 그 소름 끼치는 어둠과 적막이 나를 온종일 휘감았다. 그래서 어떤 날은, 당신 없이도 잘 살 수 있겠다는, 아주 오만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당신과의 이별을 예감하며, 나 홀로 이별 연습을 하던 날. 그날 당신의 눈에 비친 그리움을 읽었다. 그 옛날 당신에게 뜨거운 감정으로 고백했던 내 모습을, 당신 역시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많은 것들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흩어져 있었다. 그 정성 어린 마음들을 주워 단단하게 뭉치고, 그걸 당신에게 다시 전달하기에는, 이미 나에겐 뜨거운 기력 따위가 없었다. 모든 것이 찢어졌고, 흩어져 버렸다. 당신을 뜨겁게 사랑할 열정도, 이별을 감내할만한 용기도, 그 모든 걸 따뜻하게 안을 수 있는 포용력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쏟아내고 나자, 내 손아귀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나는 내 살길을 먼저 찾아야만 했다. 나는 죽기 살기로 내 삶을 찾았고, 그러는 사이 나도 당신에게서 천천히 멀어졌다. 그리고 또 한 번 외로움에 몸서리치고, 고독함에 눈물지으며, 아무 의미 없는 생각들을 늘어놓았다. 당신 없이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신 없이 살 수 없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된 것이다. 난 외로움과 고독에 익숙해진 것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 눈과 마음이 철저히 가려진 채,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나 자신을 속여왔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우리가 천천히 이별을 연습하던 중에,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나 많은 상처와 아픔을 남겼다. 그사이 사랑이라는 관계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회복되지도 못했다. 조금만 눌러도 아팠고, 피가 고여 고름이 찼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우리가 다시 좋았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글쎄, 이렇게 살짝 누르기만 해도 아픈 사랑을, 어떻게 다시 말끔한 새살로 돋게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홀로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그렇게 천천히, 어둠에 눈과 마음이 가려진 채, 어둠 속에 흩어진 지난날의 내 감정들을 더듬으며 찾을 것이다. 그 감정을 다시 줍는다고 해도, 당신을 전처럼 열렬히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당신 또한, 날 다시 돌아봐줄지 모르겠다. 누구 하나 노력한다고 해서 이어질 수 있는 사랑이 아니기에. 좋았던 지난날들을 추억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찢어진다. 이 모든 걸, 내가 다 망쳐버린 것만 같아서.


매거진의 이전글 A Different Kind Of Lov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