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영 May 07. 2022

절망과 후회의 무게

 밤중에 흩어지는 조각들이 있었다. 그 낙낙한 슬픔의 빈틈을 노리고 있던 것은, 사무치는 절망과 그리움이었다. 참회의 깊은 밤을 날아다닐 때 너는 온전한 얼굴로 내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너의 뜨거운 눈물이 내 가슴을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떠나지 마라고 붙잡는 손과 아무래도 좋으니 곁에 있으라고 말하는 그 간절함이 한동한 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네 곁을 떠나는 것뿐이었다.

 우리의 사랑을 감히 평가할 수도 없었다. 어떤 날은 이별을 쉽게 말하기도 했지만, 또 어떤 날은 입에 담기도 버거울 정도로 벅차기도 했다. 내게 너와의 헤어짐은 그런 것이었다. 손쉽게 들어낼 수도,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해버릴 수도 없는. 그래서 때론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너와의 추억들을 송두리째 들어내고도 싶었다.

 하지만 너에 대한 절망과 후회의 무게를 덜어내는 일은,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다는 안일한 생각만으로 치워지지 않았다. 이 세상에 기억을 지우는 병원이 있다면, 나는 당당하게 그 병원을 찾아갈 수 있을까. 아니, 그저 말만 번지르르할 뿐이다. 그런 병원을 찾아가지도 못할뿐더러, 설령 찾았다 하더라도 기억을 지워낼 용기를 쥐지 못할 것이리라. 내가 널 추억하는 일만이 내 곁에 없는 널 살려두는 일일 테니까. 널 잊는 건, 내가 가슴에 담아둔 너를 죽이는 일이었다. 변치 않고, 오래오래 썩지 않고, 가슴속에 푸른 나무인 상태로 멈춰있는 너를. 그런 너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

 널 잊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괴롭게 추억하지도 못한 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이 무게가 때론 벅차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다. 절망과 후회는 눈물과 슬픔의 감정을 점점 더 얇게 짓눌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슬프지 않게 되었다. 더는 널 추억하며 울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미련 같은 것이 내 일상을 지배했다. 마치 떨어지지 않는, 노을 진 시간의 검은 땅거미처럼. 네 생각은 끊임없이 내 발 뒤꿈치에 붙어 있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고, 검은 실루엣을 보며 어렴풋이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다 점차 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게 되었고, 아련해졌고, 이내 조금씩 변형되었다. 훨씬 더 완벽한 사람으로, 더없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너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너는 그렇게 조금씩 내 가슴속에서 환상의 인물로 진화했다.

 결국, 궁극적으로는 넌 내 기억 속에서 완벽한 사람이 되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환상 속의 사람. 절망과 후회가 제3의 괴물을 만들어냈다. 그 괴물은 어김없이 나의 꿈에 나타나, 내가 일상에서 타인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어느 때보다 찬란했던 미소와 어여쁜 말씨와 날 따뜻하게 안아주던 품으로 내 온 영혼을 꽁꽁 묶었다. 온몸을 비틀어도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그렇게 널 그리워했고, 그러다 결국 또 절망에 빠지면서, 상상 속의 너는 계속해서 네 몸집을 키웠다. 점점, 더, 크고, 거대하게.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널 떠나면 누구든 사랑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난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다와 파도와 윤슬, 그리고 강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