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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May 10. 2022

기억을 지우는 차, 캐모마일

 뜨거운 찻잔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캐모마일을 바라본다. 찻물에 담겨 노랗게 피어오르는 캐모마일은, 이미 메말라 죽었는데도 또 한 번 두 번째 생을 살아가는 듯했다. 헤엄치는 듯싶다가도, 노란 머릿결 같기도 한 보송보송한 잎들은 가슴에 꼭 숨겨두었던 향을 뿜어댔다. 향, 쌉싸름한 꽃향기가 혀끝에 맴돌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뜨거운 향이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중이었다.

 언젠가 당신과 함께 차를 나눠마시려 했던, 그 머그잔이다. 흙을 빚어 만든 초록색 자기 잔. 난 촌스러운 것 같다고 툴툴거렸지만, 단지 내가 내려주는 차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다고 샐쭉 웃던 당신이었다. 아무래도 좋다고, 그저 우리가 함께 차를 마실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하다고. 어린아이 같이 미소 짓던 당신의 얼굴이 떠오르자, 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목구멍을 타고 뜨겁게 흘러내린 게 찻물이었던가, 울음이었던가. 힘겹게 삼키고, 또 삼켰다.

 집 안에 꽃향기로 가득 차는데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은, 찻잔의 존재가 매우 하찮았기 때문이었다. 아주 작고 은근해서, 캐모마일이 대단한 향을 뿜어내는 줄도 몰랐다. 잠시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 사이, 방 안을 은은하게 메운 캐모마일 향이 또다시 내 가슴을 먹먹하게 적셨다. 그 노란 캐모마일 꽃잎이 꼭 당신을 닮은듯해서. 내가 당신을 잊고 잘 살고 있었다고 착각해와서.

 곁에 있을 때 소중함을 모른 채로 살았다. 내 이기심으로, 욕심으로, 어쩌면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속단으로 모든 것을 부서뜨려버린 새벽. 새벽이 꺼지자, 나의 세상에도 차츰 균열이 생겼다. 모든 게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전혀 괜찮아지지 않았다. 균열은 더 큰 금을 그었고, 그렇게 천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촘촘하게 채워 넣기 시작한 일상의 소소한 계획들은,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그 마무리 끝에는 텅 빈 허무함만이 아무 의미 없는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나는 밀려들었다 쓸려나가는, 속절없는 감정의 운동을 한참 바라보았다. 캐모마일을 내려다보는 어떤 날의 내 모습처럼.

 한겨울밤의 꿈이었다고, 그러니 이제는 꿈에서 깨어나야 할 때라고. 지친 몸을 이끌고 나지막이 속삭이던 새벽. 온몸을 움츠려, 되돌릴 수 없던 시간들을 손으로 꼽아보며, 어쩌면 하루가 죽어갈수록 당신에게 잊혀지고 있다고 믿던 수많은 밤을 헤아리며, 나는 또다시 찻물을 마신다. 캐모마일이 뜨겁게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사이, 울음을 삼키고 그리움을 내뱉으면서 조금씩 당신을 지우는 연습을 한다.

 찻잔은 지난날 당신을 회상하게 하는 매개였다. 그러나 이제는 당신을 지우는 상징이 되었다. 당신을 떠올리고, 뜨겁게 삼키고 덮어두는 일. 그렇듯 또 혼잣말한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당신도 나를 이렇게 덮어가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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