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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May 30. 2022

그건 당신에게만 행복이었고, 나에게는 불행이었다


 바지런히 부서져가는 것들에 대해, 사랑은 잔인하게도 본능을 택했다. 목덜미에 닿기 시작한 머리칼의 끝을 느끼며, 내가 살아 숨 쉼을 느꼈다. 어째서 내가 살아있는 걸까. 차라리 죽어버리고 말지. 이토록 무참히도 망가지고 부서져가던 난, 남들이 바르다고 생각하는 길을 거슬러가고만 싶어 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말할까, 애초에 마음 주는 일 따위 시작하지 않는 게 나았나. 아니, 어쩌면 그마저도 핑계같이 들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며 지내온 지난날들은, 응당한 대가가 따랐다. 마치 인생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 사람만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손해라고 말하듯이. 사랑은 끊임없이 내게 상처를 주고, 날 짓밟았다. 그럼에도 사랑은 옳고 그름에 척도를 만들어 내며, 이 선을 넘으면 나쁜 사랑이라고 가르쳐왔다. 나의 열 일은 다 제쳐두고, 하나의 사랑에만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사랑. 그 틈바구니 속에 남들은 쉽게도 넘나드는 그 선을, 나만 또렷이 명시하고 있었다.

 처음 내 사랑에 대한 신념이 무너지던 날, 그날 새벽은 무서울 정도로 시리고 차가웠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고 손을 뻗었던 것은, 이제 더는 부서지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이제 난 더는 이 사랑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아니, 난 사실 많이 지쳐있었다. 최선을 다해 당신을 사랑할 기력도, 지치지 않고 로봇처럼 바지런히 사랑만 할 자신도, 그리고 더 이상 나 자신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것조차도 싫었다. 단지 당신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지 못할 뿐이었는데, 남들이 쉽게 저버리는 초심 같은 것이었는데, 나는 유난히도 '최선을 다하지 못한 사랑'을 견디지 못했다. 언제든 변해버릴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그럴 바에야 애초에 이 사랑을 지속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내 신념을 지키자고 당신에게 상처를 줬다.

 ─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네가 힘들었던 것만큼, 이제 내가 널 사랑할 거니까.

 당신이 애처로운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그 떨리는 목소리에는 아주 짙은 진심의 향기가 풍겨 나왔다. 하지만, 이제 나는 사랑을 주고받고 하는 문제에서 훨씬 많이 벗어나 있었다. 그렇게 단순히 감정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었다. 난 지쳐있었고, 이 관계를 매듭짓고 싶었다. 당신에게서 사랑을 받는 일조차 부담이 되고, 버거워졌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차마 당신에게 그런 말을 뱉지 못한 채,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조금씩 고개를 젓는 내 모습을 보던 당신은, 이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 정말이야. 내가 당신을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

 그 진심을 알았기에 나는 차마 그 마음을 받을 수 없었다. 당신이 나에게 주는 사랑은, 당신의 일방적인 사랑방식일 뿐이었다. 그건 당신에게만 행복이었고, 나에게는 불행이었다. 당신의 사랑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것,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당신의 사랑이 거북하게 느껴지는 것, 그것은 곧 내가 당신을 사랑함과 동시에 사랑하지 않음이었다. 단지, 당신을 사랑했었단 이유 만으로, 연민으로 치닫는 이 감정을 사랑으로 포장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당신의 사랑을 안쓰럽게 또는 애처롭게 바라만 볼뿐이었다. 이제 더는 내가 지켜줄 수 없는 사랑, 그 부서진 사랑을 이어 붙이기 위해 노력하는 당신의 사랑 그 사이에는 그 어떤 끈끈함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당신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 고마워. 그 말만으로도 나 지금, 충분히 행복해.

 그건 이제 앞으로 당신이 내게 쏟을 사랑에 대한 거부의 표시이자, 나 혼자서도 잘 살아가겠다는 약속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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