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굴복시키는 바다는
세상에 긁긴 상흔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버린다.
그 사이, 웃음을 숨기며 비명을 지르는 파도에
위대한 경외감마저 밀려든다.
나의 고통, 나의 비명, 내 영혼의 괴로움은 아주 작은 먼지 한 톨이 된다.
그 부끄러움을 계속, 계속 되새긴다.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
과연 나는 누구이고, 어떤 걸 하고 싶었는지를.
깎다 만 사과, 눈물을 닦다 만 휴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듯 아무렇게나 내던진 과도가 쟁반 위를 나뒹굴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느냐며,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탓할 때 감정은 일렁이는 아지랑이처럼 요란스러웠다.
뭘 해도 안 되는 것 같고, 이제 더는 나의 영역이 아닌 것 같은 때.
신은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상황만을 쥐여준다고 하셨는데, 나에게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때였다. 시원하게 깨 부서지는 파도를 떠올린 것은.
이 위대함은 어디서부터 밀려왔을까.
잔잔한 수평선에서부터 치닫는 감정의 고통은,
동그랗게 깎인 갯바위에 부딪히고 나서야 희열을 뿜어냈다.
그 긴 고통, 언제 끝날지 모르는, 어느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솟는 시간이, 비로소 하얗게 부서지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 난 어떤 감정이 될까.
나에게 하얀 파도란 어떤 의미일까.
가슴이 차가워지는 개운함일까,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려움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다시 수평선에 서는 기분일까.
고통의 요람 속에서 평온을 찾는 일이란,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리라.
고통을 버틴 결말이 또 다른 고통을 기다리는 일이라면, 나는 더는 생을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영겁의 고통을 쌓는 일, 그사이에는 하얗게 부서지는 찰나의 희열이 있다.
우리는 그 희열을 위해 살아가고, 그 희열을 고대하며 고통을 인내한다.
그런 아주 잠깐의 단꿈이 있다면 좋겠다.
그럼 영겁의 고통도 달게, 견뎌낼 수 있게 될 테니까.